기축 통화 ‘달러’로 유연성 확보한 미국…90%가 자국 빚이라 안전하다는 일본의 맹점
[이정흔의 쉬운 경제][편집자 주 = 매일 수많은 경제 기사가 쏟아집니다. 기사를 읽고 나면 경제 이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더’ 들어가면 잘 모르는 경제 지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작은 시도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복잡한 경제 이슈와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경제 지식부터 공부해 보기로 말입니다. 때로는 경제학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의 한 대목을, 때로는 경제학에 큰 획을 그은 경제학자들과 같은 사람의 이야기로 ‘오늘의 경제’를 공부해 보는 건 어떨까요. ] 2018년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국가 부도 위기를 1주일 앞두고 벌어졌던 일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정부의 고위 경제 관료들과 여러 관계자들의 숨막히는 협상과 작전이 그려졌지요.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한국을 탈출하라’는 미국 투자자들에게 보낸 e메일로 시작합니다. 이 와중에도 뉴스에서는 여전히 한국 경제에 대한 낙관적인 소식이 흘러 넘치고 있었죠.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통해 국가 부도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점에 찾아온 ‘국가 파산 위기’는 많은 이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한 국가가 빚을 갚지 못해 채무 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 부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한 국가의 정부가 채권자에게 상환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상환할 의지가 없을 때도 디폴트는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최근에는 스리랑카와 레바논 등이 공식적으로 디폴트를 선언했죠.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습니다. 한 나라가 디폴트를 선언했다는 것은 단지 ‘빚을 갚지 못한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경제 위기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금액의 빚을 진 나라는 미국입니다. 액수만 약 3경8755조5350억원에 달한다고 하죠. 국가 경제 규모와 비교해 가장 위험한 수준의 빚을 지고 있는 국가는 일본입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2022년 기준 265%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과 같이 세계 경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나라들이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다면 그 후폭풍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두 나라가 국가 부도 사태라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 이 두 나라는 지금 얼마나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인 걸까요.
기축 통화 달러의 힘, 부채 관리에 더욱 유연한 미국
지난 2월 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공화당 소속의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치열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미국의 부채 한도 상향이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만남이 끝났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곳곳에서 경고음이 터져 나오고 있죠. 지난 2월 15일 미 의회예산처는 ‘미국이 부채 한도를 올리지 못한다면 이르면 올해 7월 국가 부도에 이를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죠. 만약 미국이 국가 부도를 맞이한다면 세계 경제가 대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말입니다.
미국의 부도는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미국의 첫 부도는 1779년 5월로 기록돼 있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의 전쟁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이후에도 1860년대 남북전쟁, 1930년대 대공황 등을 겪으며 미국은 몇 차례 부채 위기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지금까지 부도를 겪은 적이 없죠.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미국에 ‘부채 한도 상한’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 미국은 어떤 특정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때 재무부가 빚을 낼 수 있도록 의회가 승인해 주는 구조였습니다. 예를 들어 1904년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 빚을 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재무부가 ‘얼마의 자금’이 ‘어떤 용도’로 필요한지를 계획하면 의회가 이를 승인해 빚을 내는 것이었죠.
전쟁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또한 마찬가지였겠죠. 게다가 미국은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 등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돈’이 필요한 전쟁을 치르면서 매번 의회의 승인을 얻어 빚을 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고 여긴 미국은 전쟁 자금을 보다 쉽게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채 한도’를 설정했습니다. 그 한도 내에서는 따로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더라도 정부가 재량껏 국채를 발행하고 나랏빚을 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부채 한도는 정부가 나랏빚을 내 살림을 사는 데 보다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제도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미국은 정부 부채를 관리하는 데 다른 국가들보다 유리합니다. 미국의 달러는 기축 통화입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부 부채 또한 기축 통화인 달러로 표시되는 만큼 부채를 관리하는 데도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욱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게 사실입니다. 빚을 갚기 위해 언제든 더 많은 달러를 찍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이 더 많은 달러를 인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한 항상 부채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미국에도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 시스템입니다. 복잡하고 양극화된 정치 체제를 갖고 있는 미국은 재정 개혁을 시행하고 부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양당이 국가 재정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합의’에 집중하기보다 각자의 이익과 목표를 추구하는 데 더 집중할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미 공화당의 ‘부채 한도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미국보다 부채 위기 취약한 일본, “끄떡없다” 자신하는 이유
“일본 국가 부채의 절반은 일본은행이 사들이고 있다. 일본은행은 정부의 자회사다. 만기가 돌아오면 다시 일본은행에서 빌려 막으면 된다. 국가 부채가 늘어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지난해 5월 한 강연에서 쏟아낸 발언입니다. 일본 재무성이 2월 10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일본 국체 발행 금액은 1005조7772만 엔(약 9715조원)입니다. 1경원에 육박하는 금액이죠.
사실 표면적으로만 놓고 보면 일본은 미국과 비교해 부채 위기에 훨씬 더 취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21년 말 기준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 132.7%인 미국과 비교해 일본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00%를 넘어서고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일본이 “아무리 빚이 늘어도 절대 부도 위험이 없다”고 자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통 신흥국을 비롯한 국가들의 부도 위험이 높아지는 때는 금리 인상기입니다. 미국의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인상하면 각 국가가 갚아야 할 비용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기축 통화인 달러로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국가들이 그렇겠죠. 국가가 빚을 갚기 어렵게 되면 국가 신용도는 떨어집니다. 국가 신용도가 흔들리면 국채에 투자한 외국인 투자자들을 포함해 그 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화 자금이 물밀듯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국가가 위기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바로 1997년 한국이 겪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국가 부채는 그 ‘구성’이 조금 다릅니다. 국가 부채의 90% 이상을 자국민이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행을 포함한 시중은행이 국채의 대부분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만기가 도래한 채권은 그만큼 다시 찍어 낸다고 해도 언제든지 ‘돈을 빌려줄’ 대상이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 아베 전 총리가 ‘일본은행은 정부의 자회사’라고까지 표현한 이유입니다.
이와 같은 정부 부채의 구조 덕분에 일본은 현대사에서 단 한 차례도 디폴트를 겪은 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국채는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부채를 지니고 있음에도 현재 신용 평가 기관인 S&P글로벌 등으로부터 최고 등급인 ‘A+’ 등급을 유지하고 있죠. 다시 말해 일본 국채가 그만큼 투자자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안전 자산’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일본 중앙은행은 최근 몇 년 동안 대량의 국채를 매입해 금리를 낮게 유지하면서 일본 정부의 부채 상환 능력을 지원해 왔습니다. 일본의 은행들이 국채를 더 많이 매입하면 국채 금리를 낮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일본 정부가 빚을 갚는 데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부담을 줄여 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죠. 최근 Fed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 정책에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제로 금리’ 시대에서 ‘고금리 시대’로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일본이 여전히 ‘저금리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본에도 최근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010년 5%를 조금 넘었던 외국인의 일본 국채 보유 비율이 2022년 기준 13.4%까지 늘어난 상황입니다. 일본 경제가 휘청거려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130조 엔의 국채를 한꺼번에 던진다면 일본 경제에 타격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끄떡없다”고 자신하던 일본 경제에 예상치 못했던 위기가 닥쳐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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