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 화가 루이스 티파니, 빛·색채에 관심…스테인드글라스 창·납틀 유리 램프 창작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티파니②
루이스 티파니의 DOGWOOD 
사진 출처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루이스 티파니의 DOGWOOD 사진 출처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루이스 티파니 작품 
사진 출처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루이스 티파니 작품 사진 출처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거실에는 2개의 예술 작품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사진작가 안셀 애덤스의 ‘시에라 네바다의 겨울 일출’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티파니의 ‘스테인드글라스 스탠드’다. ‘시에라 네바다의 겨울 일출’은 눈 덮인 시에라 산맥 위로 여명이 밝아오는 모습 속에 동물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고개를 숙인 장면을 찍은 것이다. 흑백 사진 속에 밝고 어두움, 웅장함,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은 미국의 대표적 풍경 사진 작가인 애덤스가 그의 딸을 위해 선물한 거대한 사이즈의 사진이다. 후에 애덤스의 딸은 이 사진을 잡스에게 판매했다. 잡스가 이 사진을 얼마나 애착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잡스의 가사 도우미가 이 사진을 물걸레로 닦자 잡스는 사진의 레이어를 벗겨 내고 애덤스와 프린트 작업을 했던 사람을 수소문해 사진 복원을 맡길 정도였다.

잡스의 티파니 유리 제품에 대한 애착도 유별났다. 잡스는 어느 날 자신과 함께 일하는 팀을 데리고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의 유리 제품 전시회를 보러 미국 뉴욕 맨해튼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찾을 정도였다.
튤립 램프(1907~1912)
사진 출처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튤립 램프(1907~1912) 사진 출처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실내 장식·유리 작품 디자이너로 명성 날려
티파니는 창업자 찰스 루이스가 1902년 사망한 뒤 둘째 아들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가 회사를 이어 받으면서 많은 변화들을 겪게 된다. 루이스 티파니는 1848년 2월 태어났다. 그가 출생하던 해에 아버지의 회사인 티파니앤드컴퍼니는 보석 장신구를 제작하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사업은 찰스 티파니에게 국제적 명성과 막대한 부를 가져다줬다. 찰스 티파니는 그의 아들이 그의 뒤를 이어 사업을 맡아주길 희망했다.

하지만 루이스 티파니는 사업보다 미술에 관심이 더 많았다. 1867년 루이스 티파니는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최초로 수채화를 전시하며 수채화 화가로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19세 되던 해였다. 그 후 풍경 화가로서 왕성한 활동과 함께 1879년 실내 장식 회사를 설립해 실내 장식뿐만 아니라 유리 작품의 디자이너로서도 명성과 부를 얻었다.

또한 그는 유리 외에도 에나멜, 보석 장신구, 금속 공예품,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아르누보 스타일의 창작품들을 많이 제작하기도 했고 동시에 사업에서도 유능함을 보였다. 그는 다재다능함과 사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량 제작에 따른 부분적인 질적 하락을 가져왔다는 비판도 받았다. 일부에선 그를 천박한 상업품의 제작가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발전시켰던 다양한 예술적 경향인 여러 요소와 기법, 시각은 오늘날까지 예술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예술 활동을 통해 보여줬던 작품들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관심, 동양과 극동의 이국적인 요소들이 독창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다양한 예술적 활동 과정 속에서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납틀 유리 램프가 탄생됐다. 그리고 수채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 빛과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과 특성들은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납틀 유리 램프에도 고스란히 녹아 들었다.

1883년 당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은 티파니에 백악관의 부분 재장식을 의뢰했다. 티파니는 그 작업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백악관 개인 구역과 현관으로 나가는 복도를 구분하는 유백광 유리로 만든 거대한 가리개를 설치했다. 하지만 20년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백악관을 단순하고 절제된 신고전 양식으로 재단장했고 티파니의 가리개는 이때 철거됐다.

그럼에도 실내 장식가로서 티파니의 성공은 계속됐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인 1866년부터 대기업 소유주들과 벼락부자들이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호화 저택을 건설할 때 티파니의 실내 장식을 선택했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대중에게 과시할 필요를 느껴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고 독특한 티파니의 스타일이 거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에 앞다퉈 주문한 것이다. 당시 루이스 티파니는 실내 장식가로서의 활동과 병행해 유리에 대한 실험도 하고 있었다. 그 실험의 목적은 유리의 특별한 특성을 회복시키고 그 시대에 가능했던 모든 기술적인 방법을 통해 고대 유리가 가진 효과를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실내 디자인 분야에서 루이스 티파니는 개인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실내는 밝고 화려한 색채들과 유리 타일들로 장식했다. 그가 소개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실내 설치 개념으로 독창성을 지녔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루이스 티파니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실내 장식에서 색채에 대해 특히 강조했다. 그는 선과 형태는 짧은 거리에서만 식별할 수 있고 먼 거리에서는 소멸되지만 색채는 보다 먼 거리에서도 존재할 수 있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 
사진 출처 : gettyimageskorea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 사진 출처 : gettyimageskorea
◆ 호화 저택 늘면서 루이스 티파니 제품 인기
그 당시 미국 가정의 실내 장식의 목표는 방 안을 편안하고 아름다운 빛과 색채로 채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빛과 색채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장식 스테인드글라스와 납틀 유리 램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명 기구들도 많이 변화했다. 그 이전 양초·기름램프·등유램프·가스램프보다 20배 이상이나 밝은 백열전구가 발명되면서 변화는 시작됐다. 조명 방식의 가장 큰 변화는 위로 밝혀지던 불빛이 아래로 비추게 된 것이고 유리 램프 갓의 역할이 불빛을 확산시키는 것에서 빛을 부드럽게 완화시키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티파니의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납틀 유리 램프는 이런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수단인 동시에 독창적인 예술 형태로 진화됐다.

유리 예술 분야에서의 루이스 티파니의 공헌은 중세 고딕 성당에서 사용된 교회 건축의 대표적 요소인 기존의 스테인드글라스의 자연 채광에 의해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과는 또 다른 것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백열전구를 이용한 인공조명을 통해 스테인드글라스에 혁신적인 기법과 광범위한 사용을 가능하게 했다. 티파니 램프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납틀 유리 램프 갓도 새롭게 창조됐다.

참고 도서 : ‘티파니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납틀 유리 램프 연구’, 김호정, 숙명여대 대학원 논문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