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도전자 모습 되찾은 삼성전자..평택 반도체 공장이 짊어진 숙제들
15세기 명나라 전성기 때 중국은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보물 선단을 건조해 세계 각국에 파견, 대규모 상거래를 했습니다. 이 선단을 이끈 사람이 중국의 탐험가 정화입니다. ‘정화의 대항해’란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영락제는 “짐은 중원을, 정화 너는 바다를 다스린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명나라는 상거래를 통해 부유해졌고 조공을 하는 조선에도 받은 것 이상 내줬습니다. 하지만 영락제와 정화가 사망한 후 중국은 항해를 중단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국력이 약해졌지만 1800년 중국은 세계 경제의 3분의 1을 담당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100년 후 그 비율은 10분의 1로 낮아지고 존재감 없는 국가로 전락합니다. 19세기 먹고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인들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합니다. 미드 ‘워리어’에는 당시 중국인들의 삶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같은 19세기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였습니다. 경제사가들은 1862년을 중요한 기점으로 봅니다. 그해 주식회사를 태동시킨 회사법이 제정됐기 때문입니다. 이를 근거로 설립된 유럽의 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세계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물론 식민지 약탈이라는 제국주의적 방식이 동원됐지만….

이후 기업은 사람·도시·시대의 형태를 이끌어 왔습니다. 강한 기업이 있는 도시는 번성하고 그 나라는 강국이 됐습니다. 기업이 보잘것없는 나라는 반대였습니다.

최근 20년간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다시 그 힘을 보인 것도 기업의 수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계 100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명단에 한국 기업은 2개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41개입니다. CB인사이트가 인정한 유니콘 기업도 한국은 15개인데 비해 중국은 174개나 됩니다. 미국은 628개로 단연 1위입니다. “현대 국가의 국력은 전함과 전투기의 숫자가 아니라 세계적 기업의 숫자에 달렸다”는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기업이 도시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미국 디트로이트입니다. 디트로이트는 오랜 기간 세계 자동차업계의 수도로 불렸습니다. 1월 초 열리는 모터쇼는 자동차의 미래를 보여 줬습니다. 하지만 미국 자동차 기업의 위상이 추락하자 도시도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2013년 디트로이트는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 1위에 올랐습니다. 영화 ‘트랜스포머 3’ 촬영지로 결정된 것도 도시가 황폐해져 전쟁터의 분위기를 내기가 쉬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011년 살인 범죄율은 10만 명당 48.2명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1.5배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자동차 기업들의 실적이 회복되며 도시가 복원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경기도 평택을 통해 기업이 도시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제조업 도시 울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자가 평택에 다녀왔습니다. 삼성전자 공장이 들어선 후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팽창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기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 뭐냐고 물었더니 “젊은 사람들이 저렇게 떼지어 다니는 모습은 울산에서도 서울에서도 본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기업이 도시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지금 세계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21세기에 상상하지 못할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00년간 힘을 숨기고 준비하라’는 덩샤오핑의 유지를 저버린 중국의 시진핑은 미국과 맞짱을 뜨겠다며 나서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세계화의 주역인 미국은 온갖 장벽을 치고 미국에 공장을 짓는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이익을 공유하고 공정을 공개하라는 약탈적 행태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미·중 패권 전쟁의 고지전이 반도체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참 한국의 운명도 얄궂습니다. 이럴 때 반도체 불황까지 겹쳐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삼성전자는 평택에 세계 최대의 반도체 공장을 완성하겠다며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도전자 삼성전자’다운 모습입니다. 평택은 한국에 건설되는 마지막 대형 제조업 신도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훗날 경제사가들이 “평택 반도체 공장이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를 살렸다”는 평가를 해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