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로 약해진 기초 체력, 서비스 중심의 산업 구조, 불평등 심화…결과는 ‘중산층 몰락’
[비즈 포커스]2021년 9월의 영국. 오랜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시기에 굳게 잠겨 있던 가게들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고 길거리도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맞이한 전 세계적인 팬데믹은 영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뒤였지만 적어도 2021년 7월 ‘자유의 날’ 이후 영국은 희망이 움트는 분위기가 있었다. 2020년 9월부터 1년여간 영국에 머무르며 직접 느낀 분위기였다. 당시 영국 런던 쇼디치 인근의 버풀스트리트에서 비빔밥 가게를 운영 중인 한 상인은 “가게 문을 다시 연 지 3개월째인데 그 사이 손님이 부쩍 늘고 매출도 빠르게 회복세를 타고 있다”며 당시의 낙관적인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1년 6개월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한국에 돌아와 전해 듣는 영국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경제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사라졌고 치솟는 물가에 “이대로는 못살겠다”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넘쳐 난다. 현재 영국 런던에서 석사 공부 중인 마리아 콜로소바 씨는 “지금 런던은 집값·전기요금·음식값 등 비싸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며 “원래는 공부를 마친 후 이곳에서 직장을 잡고 싶었지만 브렉시트 이후 취업 비자를 받기도 까다로워진 상태여서 지금은 런던을 떠나 스페인이나 날씨가 좋은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해가 지고 있다. 팬데믹과의 전쟁은 전 세계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하지만 영국은 유독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영국의 2023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마이너스 0.6%로 예측했다. G7 국가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란 얘기다. 2023년 1분기 기준 GDP 규모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 전 세계 5위 경제 대국의 자리를 내주고 6위로 내려앉은 것도 치욕이다.
더욱 암울한 것은 앞으로의 전망 또한 그리 밝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처럼 영국 또한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영국 경제위기의 이유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2016년 국민투표로 결정된 ‘브렉시트’다. 물론 브렉시트를 빼놓고 지금 영국의 경제 위기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국의 암울한 현재에는 브렉시트 외에 수많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영국 산업 80%가 서비스업…팬데믹 이후 후한 정책 자금에 ‘반짝’했지만
팬데믹은 전 세계에 경제적 상흔을 남겼지만 영국은 특히 타격을 크게 입었다. 영국 통계청(ONS)에 따르면 처음으로 록다운(lockdown)이 진행된 2020년 4월 기준 영국의 GDP는 25% 하락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 조치가 이어지면서 가계 소비가 급감한 영향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또한 지난해 영국을 세계 주요국 가운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 타격을 입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팬데믹에 영국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영국 국회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영국 경제의 총 생산량 가운데 금융·서비스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79%에 달한다. 고용의 82%를 이 분야에서 책임지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의 이동에 제한을 가하는 정책은 특히 그 영향이 클 수밖에 없던 구조인 셈이다.
영국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강도 높은 ‘록다운’ 정책을 펼쳤다. 식료품점을 제외한 레스토랑과 커피숍 등은 셔터를 내렸다. 늘 사람이 붐비던 런던 템스강 인근의 공원 마저도 사람의 발길이 끊어질 정도였다. 이에 따라 음식과 숙박 등 서비스산업 부문의 피해가 유독 컸다. 실제 2020년 영국의 GDP는 9.8% 줄었다. 300년 만에 최악의 상황이라는 분석이 이어졌다. 2021년. 오랜 봉쇄 정책 이후 영국 정부는 마스크 의무 착용 의무를 해제하는 7월 19일을 ‘자유의 날’로 선포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길거리에는 다시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레스토랑과 펍 등 서비스산업이 살아났다. 봉쇄 조치의 완화로 소비 심리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소매 유통 산업 또한 빠르게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당시 OECD는 영국의 GDP가 2021년 7.2%, 2022년 5.5% 정도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G20 국가 중 가장 빠른 회복세다. IMF 또한 2021년 영국의 GDP가 7% 정도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OECD와 IMF는 특히 레스토랑과 펍 등 서비스산업이 영국의 경제 회복세를 주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같은 기대에 부응해 영국 정부 또한 팬데믹 기간에 문을 닫은 기업과 소상공인들에게 상당히 후한 금액의 정책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영국 거리에는 정책 지원금을 활용해 ‘리모델링’에 들어간 가게들이 적지 않았다. 다시 활기를 찾은 런던의 거리에서 새롭게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메랑이 돼 돌아온 ‘2021년의 희망’…지난 1년반 영국에 무슨 일이
하지만 1년 뒤 이와 같은 ‘희망의 신호’들은 고스란히 부메랑이 돼 영국에 돌아왔다. 결정적인 계기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었다. 에너지 가격이 치솟으며 전기요금과 난방비 등이 치솟았다. 식량 위기로 인해 식료품 가격이 올랐다. 팬데믹 기간에 정부의 유동성 공급으로 인해 이미 인플레이션이 진행 중이던 영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그 상승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영국의 인플레이션을 나타내는 공식 지표인 소비자물가지수(CPI)는 2022년 3월 6.2%에서 그해 10월 11.1%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2023년 2월 기준 10.1%를 기록 중이다. 42년 만의 최고치다. 영국의 CPI는 2015년을 기준으로 한다. CPI 10%는 다시 말해 2015년과 비교해 같은 제품을 구매하는 데 10%의 가격을 더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다. ONS는 ‘주택 비용’을 영국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가장 크게 기여한 품목으로 꼽고 있다. 영국의 주택 가격은 2023년 1월 기준 전년 대비 26.6% 정도 오른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주택 가격 외에 ‘에너지 가격’과 ‘식료품’ 가격 상승도 그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ONS에 따르면 영국의 전기요금은 2023년 1월까지 12개월 동안 66.7%, 가스요금은 129.4% 상승했다. 식료품 가격의 인플레이션은 2022년 12월 기준 17.6%로, 1977년 9월 이후 최고치다. 예를 들어 저지방 우유의 가격은 2021년 12월부터 2022년 12월 사이 무려 46% 올랐다. 주택과 에너지와 식료품은 모두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품목들이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조금씩 살아나는 듯하던 소비 심리는 빠르게 꺾였다. 2021년 전년 대비 30% 이상 상승했던 영국의 서비스산업지수(Index of services)는 2022년 이후 줄곧 하락세를 그리고 있다(표1). 이와 같은 흐름은 서비스업 구매관리자지수(PMI)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각 기업의 구매 담당자를 대상으로 신규 주문·생산·재고·고용 현황 등을 반영한 지표로, 50을 기준으로 50 이하면 경기가 축소되고 있다는 의미다. 2021년 기준선인 50 이하로 올라섰던 서비스업 PMI는 2022년 이후 하락세를 보이며 기준선인 50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비스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진 영국에 팬데믹 이후 곧바로 닥친 ‘전쟁’의 충격은 여느 국가들과 비교해 더욱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산업 구조에서부터 이미 영국은 외부로부터의 변수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팬데믹 당시와 마찬가지로 정부 지원을 늘리기도 어려운 여건이다. 2023년 1월 말 기준 영국 정부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약 98.9%다. 팬데믹 이후 100%를 넘어섰던 영국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소폭 하락한 추세지만 80%대에 머물렀던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비교해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금리 인상 시기에 막대한 정부 부채는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영국 정부로서는 시기적으로도 국가 지출을 늘리기보다 줄이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들…본격화하는 ‘중산층의 몰락’
아이로니컬하게도 경제 지표상으로만 보면 현재 영국 경제의 상황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는 편이다. 통상 2분기 이상 GDP가 연속으로 위축되면 ‘경기 침체’ 상황으로 본다. 지난 2월 10일 ONS가 발표한 GDP 수치에 따르면 2022년 영국은 ‘간신히’ 경기 침체 상황을 피해 갔다. 지난해 3분기 영국의 GDP는 0.2% 위축됐지만 마지막 분기인 4분기 GDP가 수축하거나 그렇다고 성장하지도 않은 ‘제자리(0%)’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고용 시장 또한 탄탄한 상황이다. ONS가 발표한 2023년 3월 기준 영국의 실업률은 3.7%다. 과거 1974년 2월 3.5%를 기록한 이후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낮은 수치다. 제레미 헌트 영국 재무장관은 “영국 경제가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보다 더 회복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영국의 경제는 지금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일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은 의견은 명확하게 ‘아니오’로 모아진다. 현재 영국의 상황은 ‘생활비 위기(cost of living crisis)’라는 표현에 가장 잘 함축돼 있다. 영국 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시민들의 삶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영국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영국에 거주하는 4가구 중 1가구는 부족한 생활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한 자선 단체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현재 영국 가구의 40%가 생필품을 살 비용이 부족한 상태로 한 달 정도의 기간을 보낸 적이 있고 이 중 24%는 거의 매달 전기요금·난방비·식료품 등의 비용을 지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뉴이코노믹파운데이션(New Economics Foundation)은 지난해 12월 “지금과 같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된다면 2024년까지 영국 내 3000만 명의 사람들이 적절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빈곤층’이 될 수 있다”며 “영국 내 전체 가구의 43%가 식탁에 음식을 놓거나 새 옷을 사거나 스스로를 치료할 돈이 부족해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중산층의 몰락’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섬뜩한 경고다. 실제로 최근 영국은 ‘살인적인 생활비’로 인해 정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영국 BBC가 3월 15일 보도한 ‘시위 캘린더’에 따르면 3월 13일부터 15일까지는 의사, 3월 15일부터 16일까지는 교사 그리 3월 16일과 18일은 철도 관리 직원 등 한 달 내내 시위 스케줄이 꽉 차 있을 정도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의사·간호사·교사와 같은 공공 부문에 종사하는 이들이 요구하는 바는 분명하다. 두 자릿수를 넘어선 물가상승률로 인해 도저히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호소다. 해마다 임금이 올라가고는 있지만 ‘쥐꼬리 임금 상승률’로는 오히려 지금의 물가 대비 월급이 적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플레이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월급을 인상해 달라는 요구다. 이와 같은 대규모 시위가 연일 이어지며 그로 인한 후폭풍 또한 만만치 않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끼니를 때우지 못해 거리로 나서면서 영국의 교육은 거의 마비 상태다. 교육뿐만 아니라 의료·교통 등 거의 모든 공공 분야가 거의 정지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처리즘의 부작용?…중산층 ’생활비 위기’ 증폭시킨 ‘부의 불평등’
2023년 현재 영국의 대규모 시위는 1978년 11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지속됐던 ‘불만의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1978년 영국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명목으로 임금 인상률 상한제를 내걸었고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에 나선 바 있다. 당시 영국은 ‘유럽의 병자’로 불리고 있었다. 산업혁명의 발원지였던 영국은 경제 대국으로서 눈부신 성장을 누렸지만 그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부작용을 겪었다. 1940년대 ‘베버리지 보고서’ 등을 계기로 복지 제도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의 대량 생산 시스템이 보편화됐지만 전통적인 생산 방식을 고수하던 영국의 경제는 급격하게 몰락하게 됐고 과도한 복지 지출로 인한 ‘고비용·저효율 구조’는 영국병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벌어진 ‘불만의 겨울’ 시위는 공공 부문을 마비시켰고 영국은 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영국의 구원자로 등장한 인물은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마거릿 대처 전 총리였다. “사회란 없다(There’s no such a thing as society)”는 말은 ‘대처리즘’의 핵심을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다. ‘국가가 국민들의 가난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개인이 스스로 자생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는 먼저 과도해진 복지 지출을 줄이는 데 먼저 칼을 빼들었다.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대규모 감세 등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앞세웠다. 이와 함께 첨단 제조 부문을 제외한 나머지 산업 부문을 금융과 서비스 중심으로 옮겨 가는 데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고비용·저효율’의 산업 구조를 ‘저비용·고효율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970년대 대처리즘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지금 이와 같은 ‘대처리즘’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2022년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스스로 ‘마거릿 대처’를 자처하며 대규모 감세 정책을 발표했지만 오히려 영국을 더 큰 혼란에 몰아넣었다. 영국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파운드화가 급락하는 등의 후폭풍을 겪은 뒤 45일 만에 사임한 ‘영국 역사상 최단 기간’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전문가들은 과거와 달리 오늘날 ‘대처리즘’이 통하지 않는 이유로 ‘달라진 영국 경제의 기초 체력’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오늘날의 영국 경제는 2016년 브렉시트 국민 투표 이후 연이은 팬데믹과 전쟁을 거치며 이미 경제의 기초 체력이 약화될 대로 약화돼 있는 상태였다는 분석이다. ‘대처리즘’은 영국 경제를 영국병으로부터 구원했지만 그만큼 많은 부작용도 낳았다. 제조업 강국이었던 영국의 산업 구조를 ‘금융·서비스업’ 중심으로 바꾸며 외부 변수에 취약하게 만든 것 또한 그 부작용 중 하나로 지적된다. 이와 함께 대처리즘의 가장 중요한 부작용으로 꼽히는 것은 ‘빈부의 격차’다. 영국의 경제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만 봐도 1970년대 이후 줄곧 우상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융 위기 당시인 2007년 38.6%로 최고점을 찍은 후 2020년 기준 34.4%로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불평등이 심각한 편이다. OECD 국가 중 다섯째로 불평등이 높다. ONS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영국 전체의 부는 가장 부유한 10%의 가구가 43%를, 최하위 5%가 9%만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심각한 ‘부의 불평등’은 오늘날과 같은 인플레이션이 왔을 때 ‘생활비 위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뒤에 ‘브렉시트’가 있다
지금 영국 경제의 ‘약해진 기초 체력’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다. 영국은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브렉시트를 결정한 후 2018년 탈퇴 협정 합의, 2020년 탈퇴 협정 발효 이후 실질적으로 브렉시트가 이뤄진 2021년 1월 1일까지 5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실질적으로 영국이 브렉시트에 성공한 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영국에는 ‘브레그렛(bregret)’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영국의 EU 탈퇴(brexit)를 후회(regret)한다는 말이다.
지난해 11월 영국의 여론 조사 기관 유고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브렉시트 결정이 잘못됐다”는 응답자는 56%로, ‘옳았다’는 응답(32%)을 크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2월 ‘영국병의 귀환(The Return of British Disease)’이라는 기사를 통해 “영국은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경제 규모를 회복하지 못한 유일한 주요 국가”라며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의 취약성을 두드러지게 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경제학자는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브렉시트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부문은 ‘무역’이다. 브렉시트는 쉽게 말해 영국의 유럽에 대한 무역 장벽이 높아지는 것을 뜻한다. 무역을 위한 절차가 복잡해지는 것은 물론 관세 등으로 인한 추가 비용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브렉시트 이전 영국의 대EU 지역의 수출 비율은 32%에 달했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많은 영국 시민들은 영국이 EU에서 떨어져 나오더라도 호주와 뉴질랜드 등 새로운 지역과의 무역을 확대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맞고 있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경제사회연구소(ESRI)가 2022년 10월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브렉시트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의 시나리오와 비교해 영국에서 EU로의 상품 수출은 16% 감소하고 EU에서 영국으로의 수출 또한 20%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브렉시트로 인해 높아진 장벽은 상품 등의 무역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해 옥스퍼드 보고서를 인용해 “지난 1년 영국의 노동력 부족을 악화시키는 데 브렉시트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다. 물론 현재 영국의 노동력 부족 현상에는 고령화로 인한 은퇴자들의 증가화 팬데믹 등의 변수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팬데믹 이전 영국의 노동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유럽에서 유입되는 노동력이 큰 폭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취업 비자 등의 절차가 까다로워지면서 특히 창고나 레스토랑과 같은 소규모 사업체들은 더 이상 기존과 같이 유럽 내 인력을 채용하는 것을 포기한 곳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기초 체력을 약화시키는 데 가장 큰 치명타가 된 것은 ‘금융 허브’로서의 영국의 위상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섬이지만 사실상 다리를 통해 유럽과 연결돼 있던 영국은 EU 시장과도 가깝고 이미 훌륭한 금융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정보기술(IT) 기업과 금융 기업들의 유럽 시장 내 허브 역할을 도맡아 왔다. 하지만 EU 탈퇴로 이와 같은 매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영국의 가전 업체 다이슨은 2019년 영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본사를 이전했고 같은 해 일본의 파나소닉 또한 유럽 본사를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옮겨 갔다. 런던의 싱크탱크인 뉴파이낸셜은 2021년 기준 440개의 금융 기업이나 직원·자산·법인 등을 영국에서 다른 EU 국가로 이전해 갔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금융 허브’로서 런던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영국 주식 시장 또한 그 타격을 받고 있다. 씨티그룹에 따르면 2000년 영국 내 상장 주식은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세계지수에서 11%를 차지했지만 23년이 지난 현재 영국의 점유율은 4%에 불과하다. 영국의 반도체 업체 암(ARM)은 3월 3일 영국이 아닌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기업공개(IPO)를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세계 최대 건축 자재 공급 업체인 CRH도 현재 미국 시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준비 중이다. 런던 최대 상장 기업인 석유 업체 쉘도 미국 주식 시장으로의 이전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가 지고 있는 영국. 다시 강국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은 당분간은 희박해 보인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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