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보다 상품권, 마일리지 포인트, 프로모션 비용 활용 사례 늘어…‘역지사지’로 생각해야

점점 더 대담해지고 지능화되는 횡령…그들이 노리는 유형과 기법[횡령을 막는 법]
작년 한 해는 기업들에 가히 ‘횡령 사고의 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유독 대형 금융·부정 사고가 속출했다. 횡령 사고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금융업에서 일반 제조·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전 업종’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했다는 점 그리고 사고가 발생한 기업 내부를 살펴봤을 때 통상 횡령이 빈발하는 재무·회계 관리 등 재경 부서만이 아니라 구매·영업 등 다양한 부서에서 사고가 생겼다는 게 특징이다.

횡령 사고의 주범은 당연하게도 회사 내부 임직원들이었고 디지털화·온라인화 시대에 맞춰 횡령 수법 역시 갈수록 기발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는 점 역시 두드러졌다.

작년에 발생한 O사와 K사의 횡령 사고는 자금·회계부서 직원에 의한 전형적 돌려 막기 식(lapping) 수법이었지만 L사와 A사에서는 영업부서 직원의 허위 프로모션과 수수료 편취에 의한 횡령 사고가 발생했고 S금융사에서는 창구 직원이 고객의 예금을 도용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제부정조사인협회(ACFE : Association of Certified Fraud Examiner)에서 매년 발간하는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총 23개 업종, 133개국에서 약 2110건의 기업 횡령(부정) 사례가 보고됐고 전체 손실 규모는 약 36억 달러(약 4조3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횡령의 손실 규모 매출의 5% 추정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ACFE가 이러한 횡령 사고로 인한 기업 손실 규모를 통상 기업 연 매출액의 약 5% 정도로까지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기업의 연 매출액의 5% 정도에 달하는 금액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횡령 또는 금융 사고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면 오너나 최고경영자(CEO)로서는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질 일이다. 특정 단계에서 우연이든 필연이든 발각되거나 처발받는 횡령 사고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기업 내부 곳곳에서 아직도 꼬리가 잡히지 않은 채 횡령이나 부정 사고가 벌어지고 있다면 어떨까. 그런 가능성만으로도 CEO는 밤잠을 이루기 힘들 것이다.

ACFE 조사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대목은 전체 횡령 사고 중 기업 자산을 오·남용하거나 사취 또는 횡령하는 자산 유용(asset misappropriation) 사례가 전체 횡령 사고의 86%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횡령 사고들도 회사 예금을 빼내 도박이나 주식 투자 등에 탕진하는 사례가 많은데 왜 이런 유형의 횡령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CEO는 횡령 사고의 가능성을 탐지할 때 목돈이 필요한 임직원 누군가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인이 어떤 이유에서든 큰돈이 필요하고 이를 충당하기 위한 방법으로 회삿돈을 사취 또는 횡령하는 부정을 계획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부정 행위자의 시각에서 보면 가장 가까이에서 본인 업무와 연관된 직무와 권한을 이용해 당장 눈앞에 보이는 회사 내 자산을 편취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몇 해 전 발생한 A은행 영업점 출납 직원의 횡령 사고는 회사 자산을 현물 편취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연체된 카드대금 때문에 급전이 필요한 상황에서 다행히 장기간 특별한 이상 없이 업무 성과를 내 지점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업무가 끝난 뒤 다른 직원들의 업무를 대신해 주는 척하면서 시재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범죄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시재금을 잠시 빼냈다가 채워 놓았지만 여러 차례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발각되지 않자 편취 금액이 커지면서 한탕을 노린 코인 투자로 진화했다. 나중에는 범죄 행위가 갈수록 대범해지면서 멀쩡한 영업시간에 본인 창구에서 계정 단말을 통해 지인 계좌에 무자원 현금을 이체한 후 퇴근 후 본인 계좌로 이체하는 수법까지 감행했다. 심지어 퇴근길에 시재금 500만원을 옷 속에 넣어 나와 자동화 기기를 통해 본인 계좌로 입금하다가 동료 직원에게 적발됨으로써 그의 범죄 행각이 중단됐다. 그가 이런 식으로 총 25여 차례에 걸쳐 횡령한 금액은 1억4000만원에 달했다.

하지만 몇 해 전 사례와 같은 현금을 직접 훔치는 방법은 최근의 전산화·디지털화된 업무 환경에서는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다. 물리적 현금(cash)보다 현금화가 가능한 상품권, 각종 마일리지 포인트·프로모션 비용을 편취하거나 법인 카드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방법, 허위 계산서를 통한 허위 비용 청구 등이 오히려 쉽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자산 유용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오너나 전문 경영인도 한 번쯤 회사 자산을 오용·유용한 적이 없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밖에 개인적 이익을 위해 착복할 수 있는 자산 또한 범죄자의 표적이 될 수 있다. 흔히 자금·회계부서 담당자가 법인 예금을 마치 자기 돈인 양 돌려 막기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예를 들어 특정 분기·특정일에 법인 통장에 대한 잔액 확인 또는 감사 등이 예정돼 있다면 회사 내 누군가가 살펴보기 전까지 돈을 빼내 투자나 다른 목적으로 유용하다가 특정일에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재입금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 같은 범죄에는 잔액 증명서 등 문서 위조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매출로 입금된 돈을 횡령하고 매출로 기록하지 않거나(매출 은닉), 고객사가 대금 지급을 완료했지만 해당 대금을 중간에서 가로채기한 후 매출 채권을 대손 처리하는 방법(부실 상각)도 자주 이용된다.

자산 관리 측면에서는 현업 자산 관리 담당자가 회사 자산을 임의로 처분해 돈을 횡령하거나 창고 담당자가 고가의 재고 자산을 빼돌려 횡령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 소비재 업종에서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 때 요리 재료를 정량보다 적게 넣고 뒤로 요리 재료를 빼돌려 현금화하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횡령 사고들을 접하다 보면 눈앞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 인간이 오히려 드문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렇듯 자산 유용은 기업 내 임직원이 일상 업무 내에서 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자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각 일선 업무에서 중복 감시(크로스체크)에서 벗어나 있는 현금(성) 자산, (고가의) 재고 자산, 매출 채권 등이 횡령 범죄자에게는 가장 좋은 타깃이다. 수시로 범죄자의 시각에서 개인적 이익을 위해 착복할 수 있는 회사 자산이나 범죄자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자산이 무엇일지 살펴보고 제대로 관리되는지 불시에 확인해 봐야 한다.

횡령의 또 다른 적극적 유형으로는 임직원이 외부와 결탁 또는 공모해 부정을 저지르는 부패(corruption) 사례가 있다. 기업 거래상 임직원으로서의 의무에 반하는 독단적인 이익을 취하기 위해 개인의 지위·권한 등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해 상충 악용, 입찰 담합, 뇌물 수수, 거래처 폐해 등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학연이나 지연으로 얽힌 관계자 혹은 전 임직원 등 지인에게 청탁을 받고 회사의 계약 등 업무를 연결해 주고 지분 또는 리베이트를 받거나 본인의 친·인척 등 이해관계인 또는 특수 관계인에게 편익을 제공하는 경우, 성과·매출 압박 또는 성과·보너스를 받기 위해 허위 매출을 일으키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는 이른바 갑(甲)의 위치에서 공급 업체 등 거래처에 비용을 전가하거나 물품 구매 강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익을 편취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

금융권에서는 내부 임직원이 외부와 공모해 회사 자산을 횡령 또는 사기 대출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이 같은 사기 대출은 처음부터 적극적인 범죄 의도를 갖고 사전 모의를 통해 치밀하게 공모하는 범죄 행위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출하기 어렵고 패턴화 역시 쉽지 않다. 하지만 유난히 외부 고객·공급 업체와 친하다거나(유착), 특정 고객·업체와의 거래 빈도가 잦고 금액이 상대적으로 큰 경우, 혹은 저성과자가 갑자기 좋은 성과를 내거나 갑자기 씀씀이가 헤퍼진다든가,돈 자랑을 하는 등의 재무적 징후가 있을 때는 유심히 살펴보는 게 좋다.

이 밖에 회사의 재무 제표를 위조해 이익을 과대 계상하거나 축소 계상하는 허위 보고(fraudulent statements) 유형이나 입사 등 위한 학력·자격 위조 역시 기업이 특별히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횡령은 우연히 또는 실수로 이뤄지지 않아
횡령(부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우연히 또는 실수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본인이 일상적으로 하는 업무 내에서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파고들 수 있는 회사의 허점이 무엇인지, 회사의 통제가 누구에 의해 어느 정도의 빈도로 이뤄지는지 등을 면밀히 연구하고 최적의 타이밍을 잡아 실행에 옮긴다. “ 열 명의 경찰이 한 명의 도둑을 잡지 못한다” 는 옛말처럼 횡령 사고는 업종별·업무별·시스템별 허점을 파고들어 고도의 책략에 의해, 예기치 못한 인물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회사의 규정이나 프로세스·시스템 등 자산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부정 행위자의 시선도 따라 움직인다는 점 역시 명심해야 한다. 동종 회사에서 한 번 일어난 사고가 같은 수법으로 우리 회사에서 발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회사가 가진 규정과 프로세스·시스템이 여러 사고에도 불구하고 크게 바뀌지 않으면 동일하거나 유사한 수법이 반복적으로 등장할 확률이 오히려 높아진다. 인간은 결국 습관의 포로이며 부정 행위자의 시각에서는 공략해야 할 대상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와 유사한 업종, 경쟁사에서 발생한 횡령 사고가 우리 회사에서 발생하지 않아 다행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다른 회사 사고에 한눈이 팔린 사이에 누군가는 우리 회사의 자산을 횡령하거나 악용하는 범죄를 현재 진행형으로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횡령 사고 예방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의 자세가 중요하다. 부정 행위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회사를 객관화해 살펴보고 동일 유사 업종에서 발생한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아 불시 점검, 담당자 순환 근무, 이중 삼중의 교차 체크 등 내부 통제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박현출 PwC컨설팅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