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동네 서점이 품은 코발트블루빛 통영 바다

통영의 봄을 닮은 '봄날의 책방' 외부 전경
통영의 봄을 닮은 '봄날의 책방' 외부 전경
“이것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시작입니다. 당신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귀여운 곰같이 사랑스럽답니다. 다음엔 이 책을 빌려 보세요.” 우연히 빌린 책에서 사랑의 메모를 발견했다. 그의 권유대로 책을 빌리자 또 다른 메모가 이어진다. 미지의 남자가 남긴 메모는 운명처럼 다가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안착한다.

운명적 상대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속 한 장면이다. 주인공 현채(배두나 분)에게 책은 러브레터이자 꿈꾸던 로맨스를 이뤄줄 매개체다. 봄이 내린 듯 샛노란 개나리색 벽의 책방을 마주한 순간 현채를 떠올렸다. 이곳이구나. 책을 향한 사랑이 시작되는 곳이, ‘다음엔 이 책을 펼쳐보라’며 사랑을 속삭이는 곳이….네가 너무 좋아, 봄날의 곰, 아니 책방만큼서울에서 콘텐츠 회사를 운영하던 정은영 봄날의 책방 대표에게 밤낮없이 몰아치는 도시의 일상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로로 건강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 전까지는….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에는 틈이 필요했다. 정은영·강용상 부부는 전국을 돌며 한 달살이를 시작했고 남쪽 끝 통영에 정착했다.

통영에서 받은 위로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작지만 소중한 가치를 콘텐츠로 만들어 보자고 결심한 두 사람은 2011년 출판사 ‘남해의 봄날’을 냈다. 남해의 봄날은 인문·사회·예술·에세이 분야의 책을 중심으로 흘러 흘러 구전돼 오는 이야기부터 사라지면 안 될 지역의 빛나는 이야기들을 종이에 엮어 낸다.
강용상 대표가 직접 제작한 간판
강용상 대표가 직접 제작한 간판
출판하는 책은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삶의 대안을 제시하는 ‘비전북스’,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로컬북스’,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작품을 소개하는 ‘봄날이 사랑한 작가’다. 소위 말하는 ‘대세’가 아닌 ‘비주류’도 사랑받을 수 있고 가치 있다는 것을 이들의 행보가 증명한다. 2012년 출판한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는 제53회 한국출판문화대상 편집 부문 대상, ‘가업을 잇는 청년들’은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기획안 공모 대상을 받았다.

2014년 전혁림미술관 옆 방치된 주택을 개조해 ‘봄날의 책방’을 열었다. 책 모양의 아기자기한 간판부터 봄 향기가 물씬 풍기는 알록달록한 외관까지 강 대표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처음에는 13㎡(4평)짜리 방 한 칸에 불과했지만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찾는 사람이 늘어나며 66㎡(20평) 정도로 집 전체가 책방으로 바뀌었다.
테마별로 꾸며진 책방 내부
테마별로 꾸며진 책방 내부
허리 남짓한 높이의 아담한 대문을 넘어서자 박경리·유치환·윤이상·백석 등 통영과 인연 깊은 예술인들의 캐리커처와 글귀가 가장 먼저 반겨준다. 내부는 주택의 형태를 거의 온전히 보존해 마치 동네 친구의 집에 들어선 듯 편안함을 선사한다. 추천 도서를 소개하는 ‘봄날의 서가’를 비롯해 푸른색의 인테리어와 아기자기한 여행·그림·바다 관련 서적과 굿즈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 바다책방, 전혁림 미술관이 보이는 ‘예술가의 방’ 등 테마별로 꾸며진 방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방지기가 손으로 직접 꾹꾹 눌러쓴 ‘책 꼬리(추천사)’가 여기저기에서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정신 줄 단단히 붙들지 않으면 대량 충동 구매의 늪에 빠질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통영, 글과 음악과 그림이 흐르는‘예향의 도시’라는 애칭에 걸맞게 마음먹고 찾지 않아도 통영 곳곳에서 예술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하소설 ‘토지’의 박경리 작가를 비롯해 시인 유치환·백석·김춘수, 음악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이중섭 등 수많은 예술가가 통영에서 활동했다. 하루를 꼬박 투자해 예술 기행을 떠날 가치가 차고 넘친다.
전혁림 화백과 그의 아들 전영근의 작품으로 장식된 '전혁림 미술관' 외벽
전혁림 화백과 그의 아들 전영근의 작품으로 장식된 '전혁림 미술관' 외벽
봄날의 책방에서 통영 예술 기행을 시작한다. 바로 옆에는 통영에서 나고 자란 ‘바다의 화가’ 전혁림 미술관이 있다. 전혁림은 통영 특유의 코발트블루 바다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다. 화가의 작품을 타일에 옮겨 장식한 미술관 외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90, 아직은 젊다’ 전시에서 전 화백의 ‘통영항’을 보고 감명받아 청와대에 걸 새로운 작품을 직접 의뢰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통영대교를 건너면 고향을 향한 순애가 가득했지만 끝내 살아 통영 땅을 밟지 못한 비운의 음악 거장 윤이상이 기다린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교과서에서 한 번쯤 들여다봤을 법한 익숙한 시를 노래한 유치환의 청마거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된 통영을 되새기기 좋은 박경리 기념관 등도 필수 코스다. 흐르는 예술의 물결 속에서 통영의 봄은 깊어만 간다.

박소윤 기자 sos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