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끝없이 ‘반복되는’ 금융의 위기와 대공황…금융 중심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내재적 모순’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경고

[스페셜 리포트- 버블이 낳은 쌍둥이, 금융위기와 이노베이션]



불과 48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미국 내 열여섯째로 큰 상업은행이었던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뱅크런은 3월 8일 시작됐다. SVB가 재정 구멍을 채우기 위해 20억 달러의 자본을 조달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뱅크런이 이어졌다. 3월 9일에만 420억 달러가 빠져나갔다. 총자산의 4분의 1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3월 10일 1000억 달러가 더 인출됐다. 많은 사람들은 2008년 금융 위기를 떠올렸다. 미국 정부의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사태 수습을 위해 예금 전액 보호와 파산 및 매각을 결정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3월 12일에는 뉴욕에 있는 시그니처은행이 도산했다. SVB의 파산에 놀란 고객들이 하루 만에 10억 달러가 넘는 예금을 인출했다. 곧이어 불길은 샌프란시스코 기반의 퍼스트리퍼블릭뱅크로 옮겨붙었다. 3월 16일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과 제이미 다이먼 JP모간 최고경영자(CEO)가 워싱턴에서 회의를 열고 JP모간이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공포는 유럽으로 확산됐다. 3월 15일 스위스에서 둘째로 큰 크레딧스위스의 주가가 30%까지 폭락했다. 뱅크런이 본격화됐다. 스위스 정부가 나섰고 3월 19일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가 크레딧스위스를 인수하는 데 합의했다. 그렇다고 이 공포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 미국 최대 증권사 찰스슈와프, 미국 4대 상업은행 중 하나인 웰스파고 등이 여전히 위기설에 휩싸여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금융 위기 극복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자본주의로 불리는 경제 시스템이 들어선 이후 250년간 수많은 위기가 있었고 위기 때마다 이를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중 2008년 금융 위기는 금융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위기였다. 금융회사가 무너지고 연이어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삶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를 극복하며 건재함을 보여줬다. 2008년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다시 같은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의 숙명인가.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역사 속 ‘은행의 실패’, 금융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가
마틴 울프 파이낸셜타임스 수석 경제논설위원은 3월 20일 ‘은행 위기를 해결할 4가지 방법’이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은행은 실패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돼 있다(Banks are designed to fail).’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은행의 위기가 구조적으로 ‘필연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은행은 자산을 보호받기를 원하는 예금자들에게 ‘안전한 보관’을 약속하는 허가받은 기관이다. 은행은 동시에 수익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이기도 하다. 은행은 가장 안전해야 하는 기관이지만 동시에 수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은행이 갖고 있는 이 ‘본질적 모순’이 지금 은행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이 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는 은행의 탄생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금이 화폐 역할을 했다. 금 세공업자들은 휴대가 편하도록 금을 금화로 만들어 줬다. 수수료를 받고 금을 보관해 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무거운 금화나 금 대신 금 보관증으로 거래하기 시작했다. 세공업자들은 한꺼번에 금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을 찾으러 오는 사람은 대략 10% 정도였다(이는 현대 은행 지급준비율의 토대가 됐다). 세공업자들은 남는 금화를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 시작했다. 대출의 시작이었다. 일부 세공업자들은 금고에 없는 금화까지 빌려줬다. 금고의 금보다 훨씬 많은 금 보관증이 돌아다녔다. 이 보관증이 화폐의 원형이 됐고 금 세공업자들은 은행의 원조가 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세공업자를 의심한 금 소유자들이 일시에 금을 찾아가겠다는 일도 있었다. 부자가 한꺼번에 금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보관증을 들고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간 것. 요즘 말로 뱅크런이다. 세공업자는 파산하고 보관증 소유자는 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현대 금융 위기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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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은행의 실패’는 반복돼 왔다. 은행의 실패가 촉발한 금융 위기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금융 위기는 전 세계를 휩쓸었던 1930년 대공황이다. 시작은 미국 뉴욕에 있는 미국은행(The bank of united states)의 파산이었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터 해밀턴이 만든 은행이다. 당시 전 세계는 이미 1929년부터 주가 폭락으로 위기감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은행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고 급기야 미국은행은 파산하고 말았다.

미국은행의 파산은 미국 은행 시스템 전반에 대한 신뢰 상실로 이어졌다. 그 여파로 수백 개의 은행이 도산했고 전 세계는 불황에서 ‘대공황’에 접어들었다. 이후 1933년 3월까지 5500개의 은행이 영업을 중단했다. 미국 전체 은행의 20%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당시 미 정부는 대공황의 원인을 상업은행의 방만한 경영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1933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명백하게 분리하는 ‘글래스·스티걸’법을 제정했다. 은행들이 고객이 맡긴 돈을 마음대로 ‘위험한 도박’을 할 수 없도록 금지한 것이다.
규제의 딜레마, 새로운 해결책
1987년 10월 19일 미국 주식 시장 역사상 최악의 날로 기록되는 ‘블랙 먼데이’가 있었다. 1987년 뉴욕 증시는 5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주가 고공 행진 중이었다. 각종 규제 완화로 버블이 형성된 결과였다. 다우지수의 연초 대비 주가 상승률은 40%에 이르렀다. 10월 19일 증시 개장과 함께 대량 팔자 주문이 쏟아졌다. 이날 하루 동안에만 다우지수는 22.6% 폭락했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11~12%)과 비교해도 2배 정도 큰 하락 폭이었다. 공포는 영국·프랑스·홍콩 등 삽시간에 전 세계 증시로 퍼져 나갔다. 10월 말까지 세계 각국의 주식 시장은 맥을 못 추고 무너졌다. 홍콩 45.5%, 영국 26.45%, 호주 41.8%, 캐나다 22.5%, 스페인 31%의 하락을 겪었다.

블랙 먼데이는 그동안 누적돼 왔던 미국의 재정 적자와 국제 수지 적자, 지난 5년여간의 주가 고공 현상, 금리 상승에 대한 불안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하루아침에 공포에 휩싸인 금융 시장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개인 투자자들의 손해는 극심했다. 이들 중에는 당시까지 이어졌던 5년여간의 주가 고공 행진에 묻지 마 투자로 뛰어들었던 이들도 상당수였다.

블랙 먼데이 이후 시장은 ‘서킷 브레이커’라는 안전장치를 도입다. 증시 폭락세가 지나치게 이어지면 시장에서 주식 매매를 일시 중지시키는 것이다. 대규모 투매 현상으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붕괴를 막고 단계별로 투자자들에게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줌으로써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15년 전 해결하지 못한 숙제, 규율되지 않은 시장
2008년 금융 위기의 씨앗은 1999년 ‘금융 서비스 현대화법’의 제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금융지주회사가 은행 외에 증권회사, 즉 투자회사를 둘 수 있게 한 것이 이 법의 골자다. 다시 말해 은행이 고객의 돈을 이용해 수익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투자할 수 있게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돈의 힘’을 등에 업은 금융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세력을 더욱 넓혀 갔다. 은행은 더 이상 예금과 적금만 권하지 않았다. 보험·펀드·신용카드·체크카드 등 다양한 금융 상품이 쏟아져 나왔고 점점 더 복잡한 금융 상품들이 고객들을 유혹했다.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바보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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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은행들이 판매를 위해 몰두하던 상품 중 하나가 ‘서브 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였다. 금리도 낮았다. 2001년 닷컴 버블 붕괴와 9·11 테러 이후 미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낮추며 사실상 ‘제로 금리’ 시대가 열렸다. 이자율이 하락하자 주택 담보 대출이 급격히 불어났다. 지금처럼 ‘저금리가 유지되고’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전제만 성립된다면 주택만큼 좋은 투자처를 찾기도 힘들었다.

은행들 또한 새롭게 금융 상품을 판매할 ‘새로운 고객’이 필요했다. 미국의 주택 담보 대출은 신용 등급에 따라 프라임(prime), 알트에이(Alt-A), 서브프라임(subprime) 등으로 구별되는데 신용 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에 주택 담보 대출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배경이다. 신용 등급이 낮을수록 대출 금리가 높다는 것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대출을 내주고 수익을 올리는 것이 목표였다. 집값의 100%를 대출해 주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주택 가격은 무섭게 올랐다. 초저금리로 시장에 돈이 풀리자 물가 또한 상승했다. Fed는 2004년 6월부터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했고 2006년 5.25%에 다다랐다. ‘빚을 내’ 집에 샀던 이들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연체율이 높아지고 은행들도 곪기 시작했다. 2008년 3월 월스트리트 5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베어스턴스가 무너졌고 같은 해 9월 158년 역사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다. 이를 시작으로 2012년까지 문을 닫은 미국 내 은행만 440여 곳에 달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는 스위스와 네덜란드 등 유럽을 넘어 우크라이나·헝가리·세르비아 등 신흥국들에까지 번졌다. 전 세계의 은행과 금융 시스템이 동시다발적으로 위험에 빠졌다.

1930년 대공황 때와 마찬가지로 2008년 금융 위기 역시 금융과 관련한 규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대표적인 것이 2010년 7월 제정된 ‘도트·프랭크법’이다. 자산 규모 500억 달러 이상 은행에 대한 건전성 규제를 강화하고 금융 소비자 보호를 강화했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역할을 분리한 볼커 룰(Volcker rule)이 포함돼 있어 1930년대 ‘글래스·스티걸법의 부활’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도트·프랭크법은 이후 과도한 금융 규제라는 비판에 휩싸이며 2018년 5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금융 규제가 상당히 약화된 도트·프랭크법 개정안에 서명하게 된다.

마틴 울프는 칼럼에서 ‘최근의 금융 위기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규제 개혁이 문제를 개선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라며 ‘금융 위기 이후 은행의 레버리지는 감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할 만큼 높은 수준’이라고 꼬집고 있다.
고장 난 자본주의, 떠도는 마르크스주의의 망령
금융은 주기적으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1920년대 러시아의 경제학자인 니콜라이 콘트라티예프는 이 주기를 45~50년으로 봤다. 콘트라티예프 파동이다. 1970년대 매사추세츠공과대(MIT)의 제이 포레스터 교수는 이 콘트라티예프 파동을 시장에 거대한 유동성이 풀리고 흡수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새로운 산업이 부흥하며 과잉 투자가 이뤄지면서 시장이 한계에 부딪치면 ‘불황’이 닥친다. 이 과잉 투자가 모두 정리되고 파산하면 문제 요소들이 사라지고 시장에는 새로운 산업이 나타나 다시 호황기에 정리된다. 이에 따르면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가 더욱 건강해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독감과도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과잉 투자와 빚 투자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8년의 금융 위기는 이전의 금융 위기와 달랐다. 미국의 위기는 순식간에 전 세계의 위기가 됐고 지나치게 커져 버린 ‘은행의 실패’는 더 이상 그 어떤 국가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국제 미디어 조직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는 이를 ‘고장 난 자본주의(crippled capitalism)’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하비는 2021년 출간한 그의 저서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설명을 시도했다. 마르크스 이론가인 그는 “항상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의 속성”을 근원적인 문제로 꼽는다. 그는 책을 통해 “1750년께 이후 자본은 1년에 복리 3% 정도로 증식했다”며 “복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크스 시대의 복리 3% 성장은 별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시대의 복리 3% 성장을 흡수할 만한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노동력’이 자본의 가치였다면 금융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자본주의는 ‘돈이 돈을 낳는다’. 돈은 원론적으로 무제한이다. 언제든 찍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을 찍어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찍어 낸 돈을 소비하고 투자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플레이션이라는 고약한 질병과 언제든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자본주의는 ‘세계화’를 통해 끝없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섰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신흥 시장이 열렸고 특히 중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시장이 이 새롭게 풀린 돈을 흡수하며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성장에 한계가 찾아왔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들의 위기 수습 방안은 ‘양적 완화’, 즉 돈을 찍어 내는 것이었다. 이는 2020년 코로나19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마어마한 돈이 풀렸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중 갈등으로 인한 ‘탈세계화’는 이미 존재하던 시장마저 위축시키며 자본주의에 새로운 위기를 낳고 있는 상황이다.

끝없이 성장만을 좇는 지금의 ‘고장 난 자본주의’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우려하는 이유다. “이대로 가면 자본주의는 망한다”고 경고하며 나선 경제학자는 이미 상당수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지금의 자본주의가 ‘10가지 초거대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한다. 부채 증가, 장기간 이어진 저금리와 과도한 양적 완화, 스태그플레이션, 통화 붕괴, 탈세계화, 불평등 심화 등 하나하나 해결하기도 쉽지 않은 문제를 복합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현재의 금융 위기가 1930년보다 2008년보다 심각할 수 있다는 경고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로버트 라이시 또한 지금의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경고를 보내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다. 라이시는 ‘자본주의 구하기’라는 저서에서 지금의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수익을 좇는 상위 1%의 거대한 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힘을 억제하고 견제할 대항적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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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는 가능할까
지금의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을까. 영국의 칼럼니스트인 아나톨 칼레츠키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 4.0’에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위기를 잉태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기를 통해 진화하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한다. 자본주의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지금까지 유지돼 왔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지금의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자본주의’를 찾는 데 실패해 왔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은행의 위기’가 2008년 금융 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진단이 제기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최근 ‘경제학 레시피’라는 신간을 발표하며 “지금의 금융 위기는 2008년 금융 위기의 후속편”이라며 “당시 금융 위기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돈을 풀어서 막았을 뿐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008년 이후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포용적 자본주의, 윤리적 자본주의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명칭은 제각각이지만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제안들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수익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성공에 대해 보다 다양한 관점과 척도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실제 2019년에는 이와 같은 관점이 받아들여지며 180명의 최고경영자(CEO)가 ‘기업의 목적’을 재정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기업의 목적이 주주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지역 사회를 비롯한 모든 이해관계인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자본의 인간적·자연적·사회적 요소를 개선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바로 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규칙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그 취약점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금융 위기 이후 15년, 다시 마주하게 된 ‘은행의 위기’는 새로운 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게 될지 관심이다.

그동안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다양한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뉴딜·초저금리·양적 완화 등이 동원됐다. 이번에는 질적 완화에 이어 전광석화 같은 진화 전략(SVB 매각)까지 동원됐다. 영국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며 일시적으로 돈을 푸는 창의적(?) 방식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여기서 빠뜨린 문제가 있다. 과거 금융 위기는 대부분은 돈을 빌려간 주체(기업이나 개인)가 어려움에 처하며 발생했다. 이와 달리 현재 진행되는 위기는 돈을 빌려주는 주체인 은행에서 먼저 시작됐다. 위기도 바이러스처럼 변이의 과정을 겪는다. 자본주의는 과거처럼 변형된 위기에 대처할 새로운 백신을 준비하고 있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