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증권사 ③미래에셋증권]

(편집자 주) 한경비즈니스는 한국 자본 시장의 주역인 증권사들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는 ‘2023 한국의 증권사’를 연재합니다.

‘자기 자본 10조6000억원, 순이익 1조원 달성.’ 미래에셋증권의 성적표다. 1997년 자본금 100억원으로 시작한 미래에셋증권은 자기 자본 약 11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증권사로 성장했다. 한국 자본 시장의 주역인 증권사들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는 ‘2023 한국의 증권사’ 오늘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의 1등 증권사(자기 자본 기준) 미래에셋증권이다. 미래에셋증권을 넘어 미래에셋금융그룹을 탄생시킨 샐러리맨의 신화를 조명했다.
‘샐러리맨의 신화’가 탄생시킨 한국 1등 증권사[한국의 증권사 ③미래에셋증권]
초대형 증권사의 탄생“적절한 가격에 인수하겠다.”

2015년 12월 21일 한국 금융투자업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온 위대한 베팅이 열린 날.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당시 KDB대우증권 본입찰 마감일 인수 가격으로 2조4000억원 이상을 쓰라고 지시했다. 미래에셋이 대우증권과 산은자산운용 인수가로 써낸 약 2조4000억원대는 이들 회사의 순자산 가치인 1조8400억원을 30% 웃도는 가격이었다. 이는 당초 자금력이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타 증권사보다 높은 가격이었다. 금융 투자업계에서는 인수 최고가로 2조2000억원의 소문이 돌 때였다.

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자기 자본 순위 4위였던 미래에셋은 2위였던 대우증권을 집어삼켰다. 그야말로 ‘메가 딜’이었다. 미래에셋이 대우증권을 인수하면서 자기 자본 8조원 규모의 초대형 증권사가 탄생했다. 명실공히 한국 1위 증권사였다. 통합 법인의 자기 자본과 자산은 당시 2위인 NH투자증권과 3위인 삼성증권을 압도했다.

시장에서는 ‘역시 승부사’, ‘샐러리맨의 신화’, ‘통 큰 베팅’ 등 박현주 회장에 대한 평가가 잇따랐다. 반면 메가 딜에 우려도 터져 나왔다. 과도한 입찰 가격과 인수를 위한 8000억원 규모의 대출금이 부담으로 작용해 ‘승자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박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대우증권은 상당한 액수를 지불해도 될 만한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한 데다 미래에셋증권과 대우의 만남은 대단한 시너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더 높은 가격을 쓸 생각도 있었습니다.” 1997년 자본금 100억원짜리 벤처캐피털로 출발한 미래에셋증권을 오늘날 자기 자본 약 11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증권사로 성장시킨 승부사의 대답이었다.샐러리맨의 야심시작은 초라했다. 동원증권의 상품운용과장으로 일하던 박 회장은 어느 날 갑자기 지점 발령을 받았다. 종합주가지수가 끝을 모르고 내릴 때였다. 긴 침체의 터널에 들어가는 상황에 지점으로 나가라니 인생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부실 점포를 회생시키는 것이었다. 50명이던 인원을 절반으로 줄이고 30대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을 영업에 배치했다. 이때 최현만 대리(현 미래에셋증권 회장)와 구재상 대리(전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를 만났다. 이때만 해도 미래에셋 창업은 꿈도 못 꿀 때였다.

박 회장은 영업 진용을 재편한 뒤 직원 교육에 나섰다. 책을 읽고 기업 분석 보고서를 쓰는 훈련을 시켰다. 영업보다 훈련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노력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5명의 인원으로 전국 증권사 지점 1000여 개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92년 지점장으로서의 첫 성과였다. 그때부터 승승장구였다. 5년 만에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이사)을 남들보다 빨리 달았다. 보장된 월급쟁이로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1996년 당시 한국 경제는 위기감이 감돌 때였다. 지점 내 기업분석팀에서의 보고 내용이나 직접 기업인들과의 만남에서 좋지 못한 신호를 감지했다. 그는 더 이상의 영업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1997년 6월 미래에셋창업투자를 설립했다. 증권업계 최고의 영업맨이란 자리를 내려놓고 최현만·구재상 등 전 직장 후배 여덟 명과 함께 자본금 100억원짜리 벤처캐피털(미래에셋벤처캐피탈)을 차렸다. 서울지역 최소 등록 요건(자본금 300억원)을 맞출 수도 없어 광주광역시에 등록했다. 미래에셋금융그룹의 시작이다.돌풍의 신호탄1998년 12월 14일. 삼성증권 창구를 통해 한국 최초의 뮤추얼 펀드(투자자들에게 모집한 자금으로 투자 회사를 설립해 주식이나 채권 등의 자산에 투자한 후 이익을 분배하는 투자 신탁)를 판매하기 시작됐다. 박 회장은 전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뮤추얼 펀드는 그의 이름을 딴 ‘박현주 1호’였다. 외환 위기 한파의 여진에 주식형 펀드 투자는 곧 손실이란 인식이 퍼져 있을 때였다. 장기 운용 상품인 뮤추얼 펀드에 고개를 저을 때였다. 하지만 투자자가 곧 주주가 되는 구조가 박 회장을 사로잡았다. 투명성이 보장된다면 고객들은 따라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의 도전은 적중했다. 한국 1호 뮤추얼 펀드인 박현주 1호는 불과 2시간 30분 만에 펀드 설정액(500억원)을 채우며 마감됐다. ‘박현주 1호’는 출시 7개월 만에 100% 수익을 돌파했다. 단기 매매 대신 삼성전자·포항제철(현 포스코) 등 저평가된 우량주에 집중 투자한 것이 성과의 요인이었다. 1999년 12월 9일 청산할 당시 이 펀드가 기록한 최종 수익률은 95%였다. 설정 1년 만에 원금을 두 배 가까이 불려준 ‘박현주 1호’는 신생 소규모 자산 운용사였던 미래에셋 돌풍의 신호탄이었다.증권업과 보험업 진출미래에셋캐피탈을 시작으로 사업 영역을 급속히 확장했다. 1997년 7월 자본금 100억원의 미래에셋캐피탈에서 다음 달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열었다. 1998년 12월 미래에셋자산운용,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했다. 당시 박 회장은 증권사를 세우면서 남다른 목표를 세웠다. 기존의 수수료 수입을 기반으로 하는 주식 중개 수수료(브로커리지) 중심 영업에서 벗어나 ‘종합 자산 운용 컨설팅사’로 성장한다는 것이었다. 미래에셋증권은 당시 업계 최저 수수료인 0.029%를 무기로 들고나왔다. 차별화된 전략이었지만 처음에는 고전했다. 당시 최현만 사장이 “회장님, 제가 잘하려고 하는데 참 어렵다”고 말할 정도였다. 박 회장은 “힘들지만 우리의 길이 맞다. 우리는 항상 도전하고 살았다”고 답했다.

고생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래에셋증권은 2000년 10월 업계에서 최단기간에 금융 상품 판매 잔액 1조원을 돌파했다. 높은 수익성과 빠른 성장세에 힘입어 2006년 2월 기업공개(IPO) 청약 때 당시 사상 최고인 293 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자산 운용사와 증권사의 성장을 확인한 박 회장은 보험업에 발을 들였다. 장기적으로 자산을 운용하려면 보험업 진출이 필수란 생각이었다. 2005년 기회가 찾아왔다. 매물로 나온 SK생명을 품에 안았다. 미래에셋생명의 시작이자 미래에셋금융그룹 밑그림의 완성이었다.박현주의 사과펀드 붐을 일으키며 탄탄대로를 걷던 미래에셋에도 그림자가 찾아왔다. 2007년 10월 창립 10주년을 맞은 박 회장은 야심작 ‘인사이트펀드’를 내놓았다. 특정 자산·지역·섹터에 한정하지 않고 전 세계의 매력적인 투자대상을 발굴해 집중 투자하는 상품이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투자하는 한국 최초의 글로벌 스윙(Global Swing) 펀드를 출시하기 위해 미래에셋은 1년 넘게 투자했을 정도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박현주 회장이 직접 운용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중 자금이 급속도로 몰려 들었다. 단기간 가장 많이 팔린 펀드 기록을 세울 기세였다. 보름 만에 3조원이 모였다. 미래에셋 측은 “급변하는 투자 환경 속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지 고민하는 투자자들에게 명쾌한 답을 드릴 것”이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1년 만에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다. 중국 증시 급락으로 2008년 인사이트펀드의 누적 손실은 50%를 넘어섰고 장기간 부진을 이어 갔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 사태로 대부분의 펀드들이 마이너스 20%대의 손실을 기록할 때였다. 인사이트 펀드는 무려 마이너스 55% 내외의 손실을 기록하며 투자자들에게 역대 최악의 펀드라는 악평을 받았다(*이후 7년이 지난 2014년 11월 인사이트펀드는 원금회복에 성공했고 2023년 4월 현재 76%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박 회장은 5년이 다 되도록 원본을 회복하지 못하자 2012년 1월 신문 광고를 통해 고해성사와 같은 사과문을 게재했다. “지난해 결과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익을 드리지 못해 아쉽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투자는 자기 책임’이라던 박 회장이 사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과문을 게재하기 직전인 2011년 한 해 동안 미래에셋 주식형 펀드는 10조원 넘게 줄었다. 전체 주식형 펀드 감소액(15조여원)의 3분의 2다. 주식형 펀드(액티브 일반)의 연간 수익률도 마이너스 16.11%를 찍었다. 48개 자산 운용사 중 43위였다. 돌풍은커녕 인사이트펀드 태풍에 좌초되기 직전이었다.도전 또 도전
미래에셋증권 본사 전경.  사진=미래에셋증권 제공
미래에셋증권 본사 전경. 사진=미래에셋증권 제공
도전은 계속됐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도전이 글로벌이다. 박 회장은 2000년대 초부터 ‘아시아 1위’를 목표로 했다. ‘해외에서는 안 먹힐 것’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 미래에셋은 한국 주식형 펀드의 인기를 뒷받침으로 아시아 지역에 진출했고 아시아 관련 펀드를 발판 삼아 유럽 등 선진 시장에 진출했다. “미래에셋 수익의 50%를 해외에서 가져오겠다”는 야심찬 꿈도 밝혔다.

2011년 글로벌 사모펀드(PEF)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토종 PEF인 미래에셋PE가 휠라코리아와 손잡고 글로벌 1위 골프공 브랜드인 ‘타이틀리스트’를 보유한 미국 아쿠쉬네트를 인수한 것이다. 12억5000만 달러(약 1조4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거래였다. 이 회사는 다음 해 미국 뉴욕거래소에 상장하면서 미래에셋에 원금의 두 배에 가까운 이익을 남겼다.

2015년에는 더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대우증권 인수다. 시장이 우려한 ‘승자의 저주’는 없었다. 그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미래에셋증권은 2015년 12월 대우증권 인수전 승리 이후 그동안 약점으로 지목돼 온 투자은행(IB)과 주식 중개 사업에서 경쟁력을 강화했다. 강점이었던 자산 관리와 연금 등에서의 사업에 이어 IB와 주식 중개, 해외 투자 등에 이르기까지 증권업의 주요 사업들 모든 부문에서 업계 선두권으로 도약했다. 2017년에는 초대형 IB 인가를 받아 한국투자증권·NH투자증권·KB증권·삼성증권 등과 함께 한국의 첫 초대형 IB 증권사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로는 승승장구였다. 미래에셋증권은 해외 현지 법인 10개, 사무소 3개 등 가장 많은 해외 네트워크를 보유한 증권사로 오랜 기간 축적해 온 해외 비즈니스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역별 특화 전략을 통해 안정적이고 균형있는 글로벌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법인은 철저한 현지화를 통한 균형 있는 수익구조 확립을 통해 종합증권사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2022년 말 기준 미래에셋증권은 한국 증권업계의 최대 자기 자본 10조6000억원을 보유한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2021년에는 업계 최초 2년 연속 세전 이익 1조원을 돌파하는 기염도 토했다. 재벌계 회사들이 득세하던 금융 투자업계에서 벤처캐피털로 출발한 미래에셋이 1위에 오른 성공 스토리다. 업계에서는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기업이란 평가도 따른다. 이른바 ‘박현주 신화’다.박 회장의 무게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창업자 박현주 회장의 존재감은 미래에셋증권의 리스크이기도 하다. 그의 확고한 투자 철학과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회사의 크고작은 프로젝트들의 방향성이 달라지다 보니 지배 구조가 양날의 검이란 지적을 받기도 한다.

2007년의 인사이트 펀드도 ‘박현주 회장이 직접 운용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자금을 쓸어 담았다. 당시 미래에셋 측은 “박 회장이 펀드 운용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며 소문 진화에 나섰지만 박 회장 이름값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컸다. 실제로 인사이트 펀드는 미래에셋 글로벌 전략 화상회의를 통해 실질적인 자산배분이 결정되었고 펀드 벤치마크는 MSCI 월드지수였다.

박 회장은 소문을 진화하기 위해 긴급 기자 회견을 열고 “나는 (인사이트 펀드에) 전략만 관여한다”고 강조했지만 역부족이었다.업계의 한 관계자는 “박 회장 한 사람에게 집중된 과도한 영향력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리스크가 될 때도 있다”며 “기업의 규모와 위상이 커진 만큼 지배 구조도 개선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미래에셋 측도 그룹의 세대교체와 함께 전문경영인 체제 안착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박 회장은 향후 미래에셋은 각 계열사가 각자 도생하는 체제로 전문경영인을 육성해 독립경영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1등 증권사 타이틀에 비해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돈 안 되는 곳’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크다. 업계 1위의 증권사이지만 자본 시장의 꽃인 리서치센터는 타 증권사에 비해 작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NH투자증권이 총 132명의 애널리스트를 보유한 반면 미래에셋증권은 40명의 애널리스트를 보유해 톱티어 증권사로는 상대적으로 소규모다.

최근 메리츠증권이 턱밑까지 쫓아오면서 영업이익 기준 1위 타이틀이 위태롭다는 점도 리스크다. 지난해에는 ‘1조클럽’ 타이틀마저 뺏겼다. 2022년 4분기 및 연간 실적 공시를 종합하면 메리츠증권은 2022년 연결 기준 연간 영업이익이 1조925억원, 당기순이익이 8281억원으로 각각 업계 1위를 차지했다. 창사 이후 최대 규모다. 반면 2020~2021년 2년 연속 연간 영업이익 1조원대를 돌파한 미래에셋증권의 2022년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8459억원, 당기순이익은 6194억원으로 집계됐다.

박 회장의 모토는 차별화다. 이를 위해 새로운 성장 동력에 늘 관심을 가져 왔다. 최근 미래에셋증권의 관심사는 ‘토큰 증권 발행(STO)’이다. 증권사 중 가장 먼저 디지털자산 비즈니스 전담 조직을 꾸린 데 이어 HJ중공업, 한국토지신탁과 STO 사업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또 음원 수익 공유 플랫폼 '핀고'를 운영하는 핀고컴퍼니와도 협력하기로 했다.

지난달 30일에는 통신업계 1위 SK텔레콤과 ‘넥스트파이낸스 이니셔티브’란 이름의 협의체를 만들었다. 양사는 토큰증권 인프라 구축과 토큰증권 대상인 기초자산 발굴, 연계 서비스 시너지 창출 등에 힘을 합치기로 했다. 미래에셋증권은 기존 증권과 토큰증권 시장을 통틀어 통합 1위가 되겠다는 각오다.

디지털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박 회장의 강한 의지가 다시 한 번 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