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영화 '기생충'의 책임프로듀서로 참여한 이미경 CJ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영화 '기생충'의 책임프로듀서로 참여한 이미경 CJ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막 작품상 같은 거 받고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어.”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한 장면이다. 미래에서 온 주인공인 진도준의 형이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에 진도준은 움찔거리고 시청자들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에는 ‘꿈도 못 꾸던’ 그 대사 한마디가 2020년 이미 현실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이다.

그런데 이 아카데미 수상 장면에서 유독 눈길을 끈 인물이 있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다. 이 영화의 책임프로듀서 자격으로 시상식에 참여한 그는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 신화’가 탄생하기까지 핵심 조력자의 역할을 도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K팝부터 영화와 드라마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한류의 위세가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전 세계인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데는 물론 ‘신선하면서도 다양성을 갖춘 콘텐츠’의 힘이 가장 컸다. K-컬처에서 ‘여성 캐릭터의 진화’나 ‘여성 아티스트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흐름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류의 위력이 커져 갈수록 글로벌 시장에서도 한국 대중문화 산업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가고 있다. 지금의 한류가 있기까지 한국 대중문화계의 ‘거물’들 가운데는 여성이 적지 않다. ‘한류의 선봉장’으로 불리는 이미경 CJ 부회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K팝에서는 소녀시대 등의 기획에 참여한 데 이어 최근 ‘뉴진스’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민희진 어도어(ADOR) 최고경영자(CEO) 등도 주목받고 있다. 한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들의 활약을 짚어봤다.
‘미나리’부터 ‘오징어 게임’까지,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
미국의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는 1905년 창간 이후 매년 3월 8일 ‘여성의 날’이 되면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들(Women That Have Made an Impact in Global Entertainment)’을 선정해 발표한다. 지난 1년간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선정되는데 배우나 가수는 물론 작가와 제작자 등 다양한 직업군이 포함된다.

올해는 특히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배우 윤여정·정호연·김주령 씨 외에 ‘오징어 게임’ 제작사 싸이런픽쳐스의 김지연 대표와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 하이브 산하 신규 독립 레이블인 어도어를 이끌고 있는 민희진 CEO 그리고 김민영 넷플릭스 아시아 태평양 콘텐츠 총괄 부회장 등이 명단에 올랐다. 버라이어티는 이와 함께 이미경 부회장을 ‘올해의 국제 미디어 우먼(International Media Woman of the Year)’으로 선정하고 커버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한국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카메라 앞’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름들이다.

이미경 부회장은 영화와 드라마뿐만 아니라 K팝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한류의 숨은 공로자’로 평가받는다. 미국 내 엔터테인먼트업계에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그는 글로벌 시장이 한류를 주목하기 전부터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공을 들였다. 2009년 개봉된 영화 ‘해운대’를 2010년 미국·중국·일본에서 직접 배급하는 등 한국 영화의 해외 진출에 선봉장 역할을 도맡아 왔다. 2020년 ‘기생충’의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가 하면 2022년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이 감독상을 받을 당시에는 대규모 옥외 광고, 유명 인사 초청 상영회 등 아낌없는 홍보 지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2년을 시작으로 10년 이상 이어져 오며 대표적인 한류 축제로 자리 잡은 ‘케이콘(KCON)’ 역시 이 부회장의 작품이다.

김민영 부회장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업계 영향력 있는 여성’에 선정됐다.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한국 콘텐츠’의 영향력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는 넷플릭스가 투자를 아끼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신선한 한국 콘텐츠’를 발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지금 우리 학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등을 발굴하며 한국 콘텐츠의 제작과 흥행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김지연 싸이런픽쳐스 대표는 ‘남한산성’을 쓴 소설가 김훈의 딸로 유명하다. 2001년 싸이더스픽쳐스에 입사해 홍보와 해외사업부 등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2008년 이든픽쳐스를 설립한 뒤 몇 편의 영화를 제작했지만 모두 흥행하지 못하고 쓴 실패를 맛봐야 했다. 모두가 마다하던 ‘오징어 게임’을 선택하며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존재감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뉴진스'부터 '아이브'까지, 성공의 주역들
최근 들어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분야는 K팝이다. 민희진 CEO는 버라이어티를 포함해 이미 오래전부터 글로벌 매체들이 주목하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 리더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인 소녀시대·샤이니·에프엑스·엑소·레드벨벳·NCT와 같은 그룹들의 독창적인 비주얼과 콘셉트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2018년 하이브로 이적한 뒤 2021년 어도어를 출범시킨 뒤 지난해 첫째 신인 그룹인 뉴진스를 선보였다. 민 CEO가 기획한 뉴진스는 신선하고 차별화된 콘셉트로 데뷔와 동시에 큰 화제를 모으며 신드롬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 사진=연합뉴스
민희진 어도어 대표. 사진=연합뉴스
최근 K팝업계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인물은 서현주 스타쉽엔터테인먼트 부사장이다. SM엔터테인먼트와 빅히트를 거쳐 2008년 스타쉽을 설립한 뒤 씨스타·몬스타엑스·우주소녀 등을 성공시키며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입증한 바 있다. 지난해 데뷔한 ‘아이브’는 멤버 캐스팅, 팀 구성, 콘셉트까지 전방위에 걸쳐 그가 직접 챙기며 기획한 그룹이다. 지난해 신인상과 대상을 동시에 휩쓸며 업계에 화제를 모았다.

JYP엔터테인먼트 최초로 여성 사내이사에 선임된 이지영 이사도 주목받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는 JYP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한 후 2PM·원더걸스 등의 핵심 멤버들을 선발하는 등 JYP엔터테인먼트 내 신인 발굴 시스템이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차세대 걸그룹으로 일컬어지는 ‘엔믹스’가 그의 진두지휘 아래 탄생한 걸그룹이다. 실험적일 수 있는 ‘믹스 팝’ 장르를 선보이며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색깔을 구축해 가고 있다.

영화·드라마·K팝에 걸쳐 여성 제작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데는 최근 달라지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과거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지상파 방송국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분위기가 짙었다. 예를 들어 아이돌 그룹들은 방송 출연의 기회를 얻기 위해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음반과 아티스트를 홍보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드라마나 영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근 들어 OTT를 비롯해 새로운 채널을 중심으로 뉴미디어가 확장되며 더 많은 여성 제작자들이 활약할 공간이 확보된 것이다. K팝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 제작에서도 시청자와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감수성’과 ‘기획력’이 중요해지는 분위기 또한 여성 제작자들의 활약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