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오래되다 못해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회색빛 동네, 젊은 창업가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저렴한 임차료, 서울 중심부라는 편리한 교통, 신도시에 질린 젊은이들이 구도심으로 눈을 돌리는 트렌드까지…. 네 가지 요소가 모이면 뜨는 동네의 성공 방정식이 된다. 사람이 몰린 곳에는 곧 자본도 몰린다. 자본이 덮친 거리는 임대료가 오르고 이를 버티지 못한 1세대 예술가들이 떠나며 곧 도시의 특색도 사라진다. 서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예술과 자본의 함수 관계가 나타난다. 이런 과정을 목격한 뉴욕의 유명한 미술가인 알렉산드라 에스포지토는 뉴욕 예술가들을 ‘미생물’에 빗대 표현하기도 했다. 가장 지저분한 지역에 들어가 더러운 것들을 다 먹어 치우고 깨끗하게 해 놓으면 땅값이 올라 또다시 더러운 곳을 찾아 떠난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의 골목들도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발굴할 서울의 다음 거리는 어디일까.
'아모레'로 한 번, ‘용와대’로 두 번 뜬 용리단길 [상권-용리단길]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지나면 홍콩 뒷골목이 나온다. 조금 더 걸으면 일본 직장인들이 퇴근 후 맥주 한잔을 들이켜는 ‘다치노미(선술집)’가 등장한다. 우리말로 ‘서서 마시는’ 술집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태원과 경리단길, 해방촌의 뒤를 이어 용산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용리단길 풍경이다.

용리단길 상권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더 급격하게 성장했다. 실제 2019년과 비교한 올해 1분기 용리단길 상권의 월평균 매출액 증가율은 을지로2·3가나 성수동 상권, 압구정 로데오거리, 신당동 상권을 압도했다.

빅데이터 전문 기업 나이스지니데이터에 따르면 용리단길 상권의 월평균 매출액은 2019년 100억5640만원에서 올해 1분기 181억 8438억원으로 80% 늘었다. 이는 같은 기간 을지로2·3가 상권(30%), 성수역 인근 상권(54.6%), 압구정로데오거리(27.5%) 등 기존 핵심 상권은 물론 서순라길(60.4%)과 신당동 상권(32.6%) 등 신흥 상권의 증가율도 앞지른다.

용리단길은 성수동부터 을지로까지 핫 플레이스가 만들어져 온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 교통이 편리해 접근성이 높은데 권리금은 낮은 낡은 골목에 젊은 창업가가 작은 레스토랑을 연다. 주변은 개발이 안 된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통해 새로운 공간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 용리단길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특히 한 명의 기획자가 용리단길의 부흥을 이끌었다는 특징이 있다. 2019년부터 효뜨·꺼거·키보·사랑이뭐길래 등 6개 브랜드를 모두 성공시킨 남준영 셰프다.
'아모레'로 한 번, ‘용와대’로 두 번 뜬 용리단길 [상권-용리단길]
용리단길 상권은 2017년 신용산역 인근에 아모레퍼시픽의 신사옥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근 대단지 아파트와 신축 오피스텔, 주상 복합까지 화려한 건물들 사이로 낡은 단독 주택과 다세대 주택, 상가 건물이 밀집해 슬럼화되던 곳이다.

하지만 교통의 요지였다. 강북과 강남 어디에서도 접근성이 좋은 용산에서도 신용산역과 삼각지역 사이에 있어 더블 역세권이었다. 대중교통을 통한 접근이 편했다. 접근성에 비해 노후 상가가 많아 권리금은 쌌다. 인근 공인중개소에 따르면 2019년까지만 해도 66㎡(20평)대 상가 권리금이 3000만원에서 5000만원 선이었다.
'아모레'로 한 번, ‘용와대’로 두 번 뜬 용리단길 [상권-용리단길]
배후 수요도 풍부했다. 아모레퍼시픽 외에도 용리단길 아래로 300m 내에 LS그룹 사옥, 신용산역 방면으로 500m 내에 가수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인 하이브 사옥 등 엔터테인먼트·에너지 업종에 종사하는 젊은 직장인 인구가 대거 유입되면서 상권이 확장됐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용리단길 상권이 속한 신용산역 상권 유동 인구는 30대 여성이 26.9%로 가장 많았고 20대 여성도 22.1%를 차지했다. 젊은 직장인들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 주택 건물이 카페나 식당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대통령 집무실이 용리단길 바로 뒤 국방부 청사에 터를 잡으면서 ‘용와대’ 시대가 열리자 다시 한 번 들썩였다. 데이터 상으로도 지난해부터 이 상권 월평균 매출액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아모레'로 한 번, ‘용와대’로 두 번 뜬 용리단길 [상권-용리단길]
급격하게 성장한 용리단길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2019년 3000만~5000만원이던 소규모 상가 권리금은 이제 이제 1억~1억5000만원으로 뛰었다. 임대료 상승도 가팔랐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용리단길 임대료는 2019년 3.3㎡(1평)당 16만4500원에서 2021년 25만5400원으로 55.2% 뛰었다.

2022년 4분기에는 다시 17만4300원으로 내려왔지만 숫자와 달리 인근 공인중개소 관계자는 “갑자기 늘어난 상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적어 임대료가 계속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남아 있는 상가 1층 73㎡(22평)짜리 월세가 500만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2018년 10월 이후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으로 임차 기간이 5년에서 10년으로 늘면서 기존에 있던 상가들은 보호받지만 신규 기획자들의 진입 장벽은 높아졌다. 지금의 용리단길을 만든 1세대 기획자들 역시 용리단길이 자본에 밀려 매력을 잃을까 우려하고 있다.

남준영 셰프는 “점포 비용만 1억원 이상 발생하면 소상공인들은 접근하기 힘들고 자본이 있는 기업이나 투자 받은 플레이어들이 계약해 버리면 가격이 계속 올라간다”며 “언젠가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경리단길 같은 쇠퇴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색적인 식음료(F&B) 매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계속 들어와야 상권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