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이념이 밥 먹여 주지는 않는다”고 외치는 T25 [EDITOR's LETTER]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란 책을 기억하시는지요. 1999년 출간된 세계화에 대한 책입니다.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에 참여한 나라들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이는 중산층 확대로 이어졌다. 중산층은 안정을 원하기 때문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렉서스는 세계화의 상징, 올리브나무는 세계화에 올라타지 못한 중동에 대한 알레고리였습니다. 20여 년 후 세계화의 파열음이 프리드먼의 나라인 미국의 중산층에서 시작됐다는 점은 아이러니입니다.

2012년 초 미국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가 제조업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습니다. “10여 년간 600만 개가 넘는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메이드 인 USA’는 자취를 감췄다. 제조업 고용 감소는 중산층의 붕괴를 불러왔다. 제조업 르네상스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의 제조업과 중산층 붕괴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위대한 탈출’의 저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은 2016년 한 콘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 15년간 특정 계층의 사망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사망 원인은 스트레스와 심각한 약물 중독 등이다.” 과거 우범지대 흑인을 묘사할 때 등장한 단어들이었습니다. 이 비극의 주인공들은 일자리를 잃은 45~54세 백인 중년층이었습니다. 디턴은 이어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사망률이 높게 나타난 백인 남성들이 주로 도널드 트럼프 대선 후보 지지층과 겹친다.” 일자리를 해외에 빼앗긴 백인 저소득층 남성들은 그해 11월 트럼프를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가치를 부인하고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추진합니다. 미국은 자신이(엄밀히 말하면 금융 자본이 주도한) 설계한 ‘하나 된 세계’를 본격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합니다. 세계화가 ‘미국의 중산층은 죽이고 중국의 중산층만 늘렸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바이든 행정부 들어 그 해체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를 가속화한 것은 중국의 야심과 러시아의 침략 전쟁이라고 봐야겠지요.

이제 자유 무역의 이상을 얘기하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미국이 중심 추 역할을 포기하자 각국은 제 살길 찾기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념은 내던지고 이익만을 좇는 현란한 움직임에 누가 누구 편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세상이 됐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미국이 오랜 기간 공들였던 올리브 나무로 표현됐던 중동 국가들의 움직임이 뚜렷합니다. 전통적 친미 국가로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과 거리 두기에 나섰습니다. 사우디는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화해도 했습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대놓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아닌 국내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필리핀·파키스탄 등은 사안에 따라 미국이나 중국의 편을 들기도 하고 뒤통수를 치기도 합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튀르키예가 대놓고 독자 노선을 걷고 있고 남미의 브라질은 독자적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들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원동력은 ‘자국의 이익’입니다. 각국에서 등장한 젊은 지도자들은 앞선 세대들과는 다른 듯합니다. 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힘을 더해 세계를 잘게 쪼개 놓고 있습니다.

미국 제조업과 중산층의 위기에서 시작된 세계 체제의 급속한 재편. 이 풍파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제조업과 중산층의 현실을 면밀히 분석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제조업은 중산층의 요람과 같습니다. 세계의 분열은 다시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