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억 날리고 파산한 ‘한맥 사건’
9년 소송전 최종 패소로 마무리
대법원은 상대방이 거래 의사 표시자의 착오를 모른 채 이뤄진 거래는 의사 표시자의 중대한 과실이 있더라도 취소할 수 없다는 판례에 따라 이같이 선고했다.
사상 최악의 ‘팻 핑거’ 사건
대법원 1부는 2023년 4월 27일 한맥의 파산 관재를 맡은 예금보험공사가 싱가포르 소재 사모투자신탁 C사를 상대로 낸 부당 이득 반환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를 판결한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보고 원고의 상고를 기각했다.
한맥 사태는 10년 전 발생한 한국 증권업계 사상 최악의 ‘팻 핑거(입력 실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중견 투자회사인 한맥이 파산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거래소가 시장 안정을 위해 직권으로 주식 거래를 취소할 수 있는 직권 취소 제도를 도입하는 등 한국 자본 시장이 크게 바뀌었다.
한맥은 2013년 3월 변수를 입력하면 소프트웨어에 의해 호가가 생성·제출되는 방식의 파생 상품 거래를 하기 위해 A 업체로부터 소프트웨어의 사용권을 구매했다. 같은 해 12월 한맥에서 소프트웨어 작동을 위한 변수 입력을 위탁받은 A 업체 직원은 변수 중 일부를 잘못 입력하는 실수를 했다. 이자율을 계산하기 위한 설정값에 ‘잔존 일수/365’를 입력하지 않고 ‘잔존 일수/0’을 입력했다.
그 결과 소프트웨어는 매수·매도 가격의 상·하단이 설정되지 않은 채 직전 체결 호가 및 최우선 주문 호가만을 검토해 이례적인 호가를 제출했다. 모든 거래가 이익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거래를 대량으로 체결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한 직원은 곧바로 컴퓨터의 전원 코드를 뽑았다. 143초 동안 12월 만기 코스피200 콜옵션·풋옵션 42개 종목에서 3만7900여 건의 거래가 이뤄진 뒤였다.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한맥이 떠안은 손실액은 462억원에 달했다.
한맥은 이 사건 거래에 참여한 한국의 증권사들에서 손실액 일부를 돌려받았다. 하지만 360억원에 달하는 가장 큰 이익을 챙긴 C사는 반환을 거부했다. 이에 한맥은 C사를 상대로 “상대방의 착오로 취득한 부당 이득금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걸었다.
1·2심 재판부는 모두 원고 패소를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고가 원고의 착오를 알고 (거래를) 이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도 원심 판결이 정당하다고 봤다.
이 사건의 쟁점은 파생 상품 거래와 관련해 거래 상대방이 의사 표시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했는지 여부였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상대방이 의사 표시자의 착오를 알고 이를 이용한 경우에는 그 착오가 의사 표시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이어도 해당 의사 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
대법원은 “착오를 알고 이용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는 파생 상품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고 계약이 체결되는 방식, 당시의 시장 상황이나 거래 관행, 거래량, 관련 당사자 사이의 구체적인 거래 형태와 호가 제출의 선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의사 표시자가 제출한 호가가 당시 시장 가격에 비춰 이례적이라는 사정만으로 의사 표시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판결은 종전 대법원의 판시를 따르면서도 파생 상품 거래에서 상대방이 의사 표시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최초로 판시한 사례”라고 밝혔다. “거래소 관리·감독 위법 없어”
같은 날 대법원 2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한국거래소가 한맥에 “한맥 대신 갚아준 채권을 돌려달라”며 제기한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 피고의 상고를 기각했다. 양 측이 9년간 벌인 소송전이 한국거래소의 승소로 확정되면서 한맥은 약 411억5400만원을 갚아야 할 처지가 됐다.
한국거래소는 한맥 사태 직후 증권사들이 모아 놓은 손해배상공동기금에서 460억원을 마련해 이 사건 파생 상품 거래에 참여한 업체들에 거래 대금을 지급했다. 한국거래소는 이후 한국의 증권사들에서 59억원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400억원이 넘는 돈은 돌려받지 못해 한맥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 소송을 냈다.
한맥 측은 한국거래소가 파생 시장의 감시 감독을 소홀히 했다며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반소로 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맥은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는 파산 원인이 발생하면서 2014년 말 금융위원회의 인가 취소 행정 명령을 받은 데 이어 이듬해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한맥과 한국거래소 간 구상권 청구 소송은 1·2심 모두 한국거래소가 승소했다. 반소로 제기된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역시 법원은 “한국거래소가 파생 상품 시장 감시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본소·반소에서 모두 한국거래소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상대방의 주문으로 인해 사전에 거래량이 급증하거나 시세가 크게 변동하는 등 원고의 조치가 필요할 정도의 이상 징후가 발생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며 “한맥 측의 개별 주문 및 거래의 법적 효력 유무에 관해 판단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다고도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돋보기] 삼성증권도 ‘뚱뚱한 손가락 실수’로 유령 주식 소동
‘팻 핑거(fat finger)’는 사람이 저지르는 기기 조작 실수로 발생한 문제를 일컫는다.
금융권에선 주로 증권을 거래하는 트레이더가 주문을 입력하는 과정에서 일으키는 실수로 통한다. 최근엔 전자 금융이 보편화되고 가상자산의 사용이 늘면서 일반인 가운데서도 팻 핑거 사고가 속속 발생하고 있다.
삼성증권의 ‘유령 주식’ 배당 사고는 한맥 사태만큼이나 큰 파장을 일으킨 팻 핑거 사건으로 꼽힌다. 삼성증권은 2018년 4월 우리사주 직원들에게 배당하는 과정에서 ‘주당 1000원’을 ‘1000주’로 잘못 입력했다.
그 결과 110조원 상당의 삼성증권 유령 주식 28억 주가 추가 발행됐다. 이를 포착한 직원 21명은 순식간에 500만 주를 팔아 치웠고 삼성증권 주가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해당 직원들은 유령 주식을 매도한 혐의(자본시장법 등 위반)로 재판에 넘겨져 실형이 확정됐다.
2022년 말 경남 남해축산농협의 한 직원이 창구에서 판매해야 할 금리 10% 적금 10억원어치를 온라인에서 판매했다. 이 상품은 인터넷 재테크 카페 등을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반나절 만에 5800여 계좌, 1277억원대의 계약 금액이 몰렸다. 이 규모로 해당 상품이 운영된다면 남해축협이 매달 지급해야 할 이자만 80억원에 달했다. 남해축협은 전 직원을 동원해 해지 요청을 하는 등 소동이 빚어졌다.
해외 시장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미즈호증권의 사례는 일본 역사상 최악의 팻 핑거 사고로 평가받는다. 2005년 이 회사의 한 직원이 61만 엔짜리 제이콤 주식 한 주를 팔려다 주식 61만 주를 1엔에 내놓은 사건이다. 회사는 1분여 만에 실수를 파악하고 주문을 취소했지만 이미 수만 건의 주문이 체결된 뒤였다.
이 사고로 미즈호증권은 약 407억 엔(약 4000억원)의 손해를 봤다. 2010년 미국의 한 투자은행 직원은 ‘밀리언(million : 100만)’의 ‘m’을 눌러야 하는 상황에서 ‘b’를 누르는 실수를 했다. 컴퓨터는 이를 ‘빌리언(billion : 10억)’ 단위로 인식했고 각종 매매 소프트웨어가 연쇄적으로 작동하면서 15분 사이 다우존스 평균 주가가 9.2% 폭락했다.
2021년 말 한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 거래소에선 30만 달러 가치의 작품이 10분의 1 가격인 3000달러에 판매됐다. 해당 거래소의 한 판매자가 ‘지루한 원숭이 #3547’을 75이더리움에 판매한다고 밝히고 실수로 0.75이더리움을 입력했기 때문이다. 해당 작품은 시장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새 주인을 찾았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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