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약에서 구하옵소서 9
1918년 적십자의 ‘간호사 구하기’ 캠페인 포스터
성모 마리아 이미지의 여성 간호사가 군인 환자를 품에 안고 있다
1918년 적십자의 ‘간호사 구하기’ 캠페인 포스터 성모 마리아 이미지의 여성 간호사가 군인 환자를 품에 안고 있다
간호 직종은 지난 7년간 입소스 모리의 진실성 지수(Ipsos Mori’s Veracity Index)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 오고 있다. 2022년 12월 조사에서도 설문 대상자의 94%가 간호사의 진실성을 신뢰한다고 답해 사서(93%), 의사(91%), 교사(86%) 모두를 앞질렀다. 성직자보다 우위다.

같은 해 5월 영국 유거브(YouGov)가 실시한 여론 조사는 더 확실한 결과를 보여준다. 사회 공헌도가 가장 큰 5개 전문 직종 중에서도 간호사가 의사·교사·과학자·엔지니어를 제치고 독보적 1위를 기록한다. 비단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2023년 1월 미국 갤럽 조사에서 가장 높은 윤리 평가를 받은 직종 또한 간호사였다. 의사·변호사·교사·종교인·기자 등 조사 대상에 포함된 17개 전문 직종을 압도하는 지지를 받았다. 코로나19 사태라는 변수를 떠나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지켜 온 영광이다.
의료를 넘는 간호의 약진, 그 구조적 배경

갤럽 조사 1위 간호사(78%)에 이어 2위는 의사(62%)가, 3위는 약사(58%)가 차지함으로써 의료계 전반에 대한 미국인의 호의적 평가와 존중이 감지된다. 특이한 점은 간호사에 대한 환자들의 만족도가 의사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사실이다.

의사에 대한 간호사의 상대적 우위는 전문 의료 설문에서도 나타난다. 병원 소비자 건강 플랜 평가 설문 조사(HCAHPS)는 입원 기간 중 의사·간호사·기타 직원에게 받은 진료에 대한 환자들의 평가에 기초한다. 2006년부터 시작된 HCAHPS에 따르면 환자들은 호응성·의사소통·팀워크 등 모든 측면에서 의사보다 간호사에게 더 큰 만족을 표했다.

이 같은 결과는 상투적 간호 예찬을 넘어 어떤 거대한 변동에 대한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 변화를 잘 포착한 리포트가 ‘유로 바로미터 411 : 유럽 연합의 초국경 의료 서비스에서 환자의 권리(2014년)’다.

리포트는 ‘대부분의 회원국에서 간호는 여러 측면에서 의료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응답자들은 환자의 권리와 존엄성 보호, 치료에 대한 참여 보장, 의사소통력과 유연한 조정력 등 측면에서 의료보다 간호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요약한다.

의료와 간호가 분리 대비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하자. 의료는 전문인에 의한 질병 진단과 치료 범주이고 간호는 환자의 환부·건강·일상·정서 관리로 통상 구분된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인구 구조와 사회 변동에 따라 간호 범주가 급속히 팽창했고 기존 의료 분야와 구분되는 부문으로 간호가 독자 설정된 것이다.

그 배후에는 의료와 복지의 융합이 있다. 양자의 상호 수렴에 따라 의료의 패러다임이 질병 관리와 치료에서 건강과 안위의 문제로 재설정된 것이다. 이에 상응해 신체·물리적 건강 못지않게 환자의 정서적 안정과 만족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세계적 고령화는 이런 추세를 가속시킨다. 그래서 의료는 기술과 과학만큼이나 인간 친화성을 요하게 됐다. 그 결과 정서·교감·소통·이해·신뢰 같은 비과학적·비의료적 요소들이 현대 의료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마디로 의료의 복지화는 인간 중심성 복원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치료에 방점을 둔 기존 의료 행위·기관·주체에 비해 환자와의 관계성 강화에 중점을 둔 간호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존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시대적 환대, 경제적 홀대, 제도적 천대
포브스의 ‘간호사는 의료 미래의 핵심이다(2020년 5월 12일)’ 기사는 이런 변동을 평이한 말로 풀어준다. 간호사가 의사에 비해 환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훨씬 강한 유대감과 신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치료 계획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해 각 환자의 필요에 대해 포괄적이고 개별화된 접근 방식을 제공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영국 가디언도 ‘간호사들이 의료 체계의 실패에 맞서 싸우는 방법(2020년 1월 20일)’에서 기술적인 의료 시스템 대신 개별적 소통에 기초한 환자 친화적 케어를 진일보한 의료라고 진단하면서 그 중심에 간호 인력이 있다고 평가한다.

‘간호사의 역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하고 확장돼 왔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환자 치료에 대한 헌신’이라며 그들의 헌신을 현대 의료 체계의 결핍을 채우는 최대 자산이라고 지목한다.

하지만 기사는 매우 우울한 현실로 눈을 돌린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환자 치료를 위해서는 우수한 간호 인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간호 인력 확충의 어려움은 깊어만 간다.’

뉴욕타임스도 간호 공백 우려에 가세한다. ‘양질의 간호와 향상된 치료 및 건강 결과의 상관성은 다수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하지만 간호사에 대한 만성적 투자 부족으로 신규 채용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2021년 3월 2일).’

영국보건서비스(NHS) 인력 정책 책임자 미리암 디킨은 “NHS의 간호 인력 부족이 가장 시급한 의료 문제다. 그들 중 상당수가 고강도 노동으로 육체적·정신적 소진을 겪고 있고 우려할 만한 수의 퇴직이 지속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간호사를 구하라 [몸의 정치경제학]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 간호사의 평균 임금은 미국과 캐나다 임금 수준에 현저히 미달한다. 가장 긴 평균 근무 연수를 고려하면 호주 간호사의 평균 임금에도 밀리는 현실은 나이팅게일의 나라로서 상당히 곤혹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간호사의 평균 임금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최악의 환경으로 꼽히는 일본과 유사한 수준이다. 그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짧은 평균 근무 연수다. 빈번한 이직과 퇴직은 업무 효율과 전문성 약화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다시 의료 서비스의 질적 저하로 연결될 공산이 크다.
간호사를 구하라
세계대전으로 찌든 20세기 내내 간호사는 ‘백의의 천사’로 칭송됐다. 코로나19 사태 기간 동안 우리는 간호사들을 영웅으로 찬미했다. 앞서 여론 조사 결과들도 간호 인력에 대한 대중의 절대적 신뢰와 존중을 표한다.

그들의 값진 노동에 대한 보상은 왜 이토록 ‘저렴’한 것일까. 왜 그들은 저급한 처우를 받으며 이직·전직·퇴직을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법을 공부했다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어떻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간호법 약속을 그리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일까. 여측이심 (如厠二心). 뒷간 갈 때와 나올 때의 다른 두 마음. 이 못된 사회적 습성.

NHS 최근 자료에 따르면 영국은 현재 4만 명의 간호사 부족을 겪고 있고 그 수는 2~3년 내에 12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2~3년 내 45만 명의 간호사 부족이 예상(PBS)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30년까지 세계적으로 1300만 명의 간호사 부족으로 의료 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간호사에 대한 경제적 홀대와 제도적 천대가 거대한 간호 재앙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간호사를 구하라(Save the Nurses).’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간호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적십자사가 벌인 캠페인이다. 유럽과 미국 모두 간호사 수가 극도로 부족해지면서 이미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간호사의 역할과 책임이 확대되자 의사들과의 마찰 또한 격화됐다.

이에 적십자사는 간호 학교를 설립하고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여성들의 간호 전문직 진출을 장려했다. 그 결과 전쟁 기간 동안 2만 명 이상의 간호사가 모집됐다. 이 캠페인을 통해 간호는 더욱 전문화됐고 숙련된 의료 전문가로서 그들의 위상은 높아졌고 그들의 근무 조건 또한 개선됐다.

바로 지금이 ‘간호사 구하기’ 캠페인을 재개할 때가 아닌가 싶다. 간호사 ‘구하기’는 중의적이다. 새로운 간호 주체를 찾고 발굴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현재 간호 인력을 위기와 난국에서 지키고 보호한다는 의미도 크다. 가장 강력한 ‘간호사 구하기’는 간호법 제정이다.

몰상식하지 않은가. 최고의 신뢰와 사회 공헌으로 인정받는 직군이 경제적 홀대도 모자라 제도적으로 괄시 받는다는 사실이…. 그리고 분명하지 않은가. 그들을 ‘구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를 구하는 것임이….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