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모습./연합뉴스
서울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모습./연합뉴스
전세는 오랜 기간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에게 사랑받아 오던 제도다. 세입자는 일정 보증금만 맡기면 추가적인 임대료 지급 없이 계약 기간 동안 독점적으로 그 집을 사용할 수 있고 집주인은 이자 없이 정해진 기간 동안 보증금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던 전세 제도가 지난 몇 년간 삐걱대고 있다. 2020~2021년에는 역대급 전세난이 펼쳐지더니 최근 1년 동안은 역전세난이 퍼지고 있다. 최근에는 역전세난이 퍼지면서 전세 만기가 돼도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임대인이 늘어나자 전세 사기라는 용어까지 마구잡이로 쓰이고 있다.

과거에도 전세난과 역전세난이 벌어진 적이 많지만 지금과 같이 심각한 적도 없었고 짧은 기간 동안 시장 분위기가 급변한 적도 없었다. 그러면 최근 들어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심화되고 있는 것일까.전세 사기 중심에 대출이 있다
그 중심에는 전세 자금 대출이 있다. 전세 자금 대출이 어려웠던 과거에는 자산에 따라 주거 형태가 명확히 나뉘었다. 자산이 많은 사람은 자가에서 거주하는 비율이 높았고 자산이 중간 정도인 사람은 전세에서 거주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반면 자산이 형성되지 않은 계층은 월세로 거주하다가 어느 정도 자산이 모이면 전세로 갈아타고 나중에 더 자산이 모이면 집을 사기도 했다. 이를 ‘주거 사다리’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전세 자금 대출이 일반화되자 이런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자산이 적어 전세를 살기 어려웠던 사람도 전세 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금리 상황에서는 전세 자금 대출 이자가 월세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월세보다 전세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자 인기 지역을 중심으로 전세 시장이 과열되기 시작했었다. 전세 자금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면 전셋값이 낮은 지역으로 빠져나가거나 월세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전세 시장에 몰리면서 전셋값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전세 자금 대출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10여 년도 넘은 이명박 전 대통령 때부터다. 집값을 잡기 위해 반값 아파트로 불리던 보금자리주택 공급이라는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무주택자들은 집을 사기보다는 전세 시장에 머무르면서 보금자리주택에 당첨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무주택자에게만 기회를 주던 보금자리주택에 당첨되면 상당한 프리미엄이 보장되기도 하지만 매매가도 거의 오르지 않는 시장 상황 속에서 집을 서둘러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세 사기와 포퓰리즘[아기곰의 부동산 산책]
이렇게 되자 예전에는 안정됐던 전세 시장이 요동치면서 많은 세입자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본인들이 모은 돈으로는 전셋값 상승분만큼 올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부에서 내건 해결책이 전세 자금 대출 확대다. 세입자가 원하는 만큼 대출을 해줘 본인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다.

문제는 그 부작용으로 시장의 전셋값이 더 올랐다는 것이다. 그 집에 살고 싶어 하는 다른 세입자도 전세 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시장 전체의 전셋값을 높여 놓는 결과가 됐다.

더구나 그 이후 정권들도 이를 바로잡기가 어려웠다. 기존 집에 살고 있는 세입자에게 전세 자금 대출 연장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그 세입자를 더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불만의 화살이 본인들의 정권을 겨눌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세 자금 대출 규모를 줄이기는커녕 세입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서민 주거 안정 대책’이라는 미명 아래 오히려 전세 자금 대출 규모는 커져만 갔다.

계속 불어나던 전세 자금 대출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미국발 금리 인상 시기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급격하게 올리기 시작하자 대부분 변동 금리였던 전세 자금 대출 이자가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려움에 봉착한 세입자들이 월세로 전환하거나 전세금이 더 낮은 지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전셋값이 비싼 수도권이 지방보다 더 많이 떨어졌고 같은 서울이라도 강남 지역이 강북 지역보다 전셋값이 더 떨어진 것이다. 지난 1년간 강남구의 전셋값이 19.0%, 송파구가 19.5% 떨어지는 동안 중랑구의 전셋값은 9.6% 하락에 그쳤다.

전세 사기와 포퓰리즘[아기곰의 부동산 산책]
한마디로 전세 자금 대출 이자의 급격한 상승이 전세 수요를 줄이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과 같은 역전세난이 벌어졌다. 이러한 역전세난은 현재도 빌라나 오피스텔 시장을 중심으로 전세 보증금 미반환 사태로 이어지고 아파트 시장으로 점점 확대되는 양상이다. 국민 전체가 전세 사기 숨겨진 피해자
그런데 전세 보증금 미반환 사태의 피해자는 누구일까.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직접적인 피해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숨겨진 피해자는 국민 전체다.

전세 자금 대출 제도의 본질을 살펴보자.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고 해도 아무나 빌려주지 않는다. 주택 담보 대출의 경우 원리금을 갚지 않는다면 담보로 걸린 집을 처분해 은행에서 원리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담보도 없는 전세 자금을 왜 은행에서 빌려줄까. 정부에서 보증을 서 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세금을 떼이면 은행이 손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보증을 서 준 정부가 손해 나는 구조다.

결국 현재 전세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부작용들이 전세 자금 대출에서 시작된 것이다. 물론 전세 자금 대출 제도를 일거에 없애기는 어렵다. 전세 자금 대출을 연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 세입자들을 월세 시장으로 내몰거나 더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세 자금 대출이 없어지면 전세 시장에 들어오는 자금이 줄고 이는 전세 수요를 급격히 줄이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역전세난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매매 시장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현재 전세 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부작용을 잡기 위해서는 전세 자금 대출 제도를 폐지하거나 크게 축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모아 놓은 자산이 적다는 이유로 현 거주지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는 현실적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적정한 균형점을 모색할 시점이다.

아기곰 (‘아기곰의 재테크 불변의 법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