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성장세 둔화…소비 분산과 소비 위축에 영향
경제적 접근성 중요해지며 매스티지 브랜드 급부상
오프라인 차별화 중요해지며 리뉴얼 단행

[완만해진 성장 곡선, 매스티지, 침체되는 리셀 시장…특이점이 온 명품]
‘18조원, 세계 7위’

한국인들의 ‘명품 사랑’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수치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명품 시장 규모는 18조6000억원으로 집계돼 글로벌 국가들 가운데 7위를 차지했다. 시장은 5년 만에 5조원 이상 커졌고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제 명품은 장롱에 고이 모셔 뒀다가 결혼식장에만 들고 다니는 ‘고급 상품’이 아니다. 누구나 가질 수 없었기에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로 작용했지만 이제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거리에서, 포장마차에서…. 모두가 값비싼 가방을 든다. 명품의 대중화다. 한국의 명품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올해는 다르다.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백화점 명품관 매출은 쪼그라들고 리셀 시장은 거품이 꺼지고 있다.

하지만 명품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여전히 소비자들은 비싸지만 신선한 브랜드를 수소문하고, 남들이 살 수 없는 한정판 제품을 원한다. 성장 속도는 더뎌지지만 시장은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 한국 명품 시장은 평균이 실종된 과도기에 있다.
샤넬 매장. (사진=최수진 기자)
샤넬 매장. (사진=최수진 기자)
코로나19 사태는 한국 명품 시장에는 축복이었다. 해외여행을 못 가게 될 젊은이들이 그 돈으로 골프를 하지 않으면 명품을 샀다. 20~30대라는 새로운 명품 소비층의 등장이었다. 백화점 이나 면세점 앞에는 영업시간 한참 전부터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픈런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백화점들도 뜻밖의 호황을 누렸다. 명품을 재판매하는 리셀 시장도 확 커졌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고 엔데믹(주기적 유행)을 맞아 시장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명품 판매는 꾸준히 늘고 있지만 성장세는 둔화하고 있다. 숨 고르기에 나선 모습이다. 가격 인상을 앞둔 특별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오픈런은 자취를 감췄다. 백화점에는 대기 없이도 들어갈 수 있는 매장이 늘고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자산 시장의 위축이 첫째 원인으로 꼽힌다. 부동산 시장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식 시장도 시들하다. 곳곳에서는 “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소비 심리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가설은 해외여행 수요 증가다. 명품 살 돈으로 여행을 간다는 말이다. 명품과 해외여행의 상관관계는 더 지켜봐야 하지만 한정된 자금을 써야 하는 젊은 세대의 소비 패턴으로 보면 두 가지는 대체재의 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명품 시장이 성장을 이어 나가는 배경에는 새로운 명품의 등장이 자리 잡고 있다. ‘경제적 접근성’이 좋은 ‘매스티지(대중 명품)’ 브랜드들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기존 명품보다 저렴하면서도 ‘플렉스(과시하는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차별화를 원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소비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비싼 값을 지불하더라도 길에서 마주치지 않는 브랜드를 원하기 때문이다.
명품 브랜드별 성장세. (자료:각사, 그래픽=박명규 기자)
명품 브랜드별 성장세. (자료:각사, 그래픽=박명규 기자)
한 자릿수 성장…완만해진 상승 곡선명품 시장은 빠른 성장은 멈춘 듯 보인다. 올 들어 기울기가 완만해졌다. 한국 백화점의 실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난해까지 두 자릿수 성장세를 기록했지만 올해 이 수치가 크게 줄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1월부터 5월까지 명품 카테고리가 전년 동기 대비 31.9% 성장했지만 올해는 같은 기간 5.6% 성장에 그쳤다.

롯데백화점의 올해 1~5월 명품 카테고리 성장률은 7% 수준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30%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크게 줄어든 수준이다. 현대백화점도 마찬가지다. 명품 카테고리의 전년 대비 성장률은 지난해 1~5월 32.5%를 기록했지만 올해는 6.8%로 낮아졌다.

갤러리아백화점은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갤러리아 관계자는 “한화솔루션에서 떨어져 재상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치를 공개가 어렵다”며 “역성장 중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역기저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지난 2년간 명품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올해 성장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삼정KPMG는 “코로나19 사태로 해외여행 제한이 계속되면서 명품 구매 수요가 백화점에 집중되고 보상 소비 성향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주요 유통 업체 매출 자료’에 따르면 백화점의 2020년 매출은 전년 대비 9.8% 역성장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심화하면서 방문객이 줄어든 영향이다. 잡화, 여성 캐주얼, 남성 의류 등 주요 카테고리의 매출이 두 자릿수 하락세를 기록했다. 반면 명품이 포함되는 ‘해외 유명 브랜드’ 매출은 같은 기간 15.1% 증가했다.

2021년에는 백화점의 해외 유명 브랜드 매출이 37.9% 급증했다. 심지어 2021년 3월에는 명품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89.0% 늘어났다. 코로나19 사태의 기저 효과에 보상 소비가 더해진 영향으로, 명품이 전체 백화점 실적을 견인했다. 백화점의 전체 매출은 전년 대비 24.1% 늘었다. 지난해에도 백화점의 해외 유명 브랜드 매출은 전년 대비 20.5% 늘었다.

명품의 마이너스 성장은 올 들어 발생한 현상이다. 올해 1월 백화점 해외 유명 브랜드 매출은 전년 대비 7.2% 감소했다. 2020년 3월 이후 역성장을 기록한 것은 올해 1월이 처음이다. 올해 2월에는 전년 대비 2.1% 성장했지만 소폭 성장에 그쳤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30% 이상 성장했지만 크게 둔화된 모습이다. 3월과 4월에도 각각 3.3%, 4.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업계 관계자는 “명품 시장이 지난 2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해 역기저 효과가 있다”며 “연간 기준으로 역성장 우려도 있다. 기존 VIP를 제외한 일반 고객들의 명품 구매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백화점 명품 전년 대비 성장률. (그래픽=박명규 기자)
백화점 명품 전년 대비 성장률. (그래픽=박명규 기자)
경제적 접근성, 명품 시장 관통하지만 모든 명품의 성장이 꺾이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 주목받는 분야도 있다. ‘준명품’을 의미하는 매스티지 브랜드다. 매스티지는 ‘매스(Mass : 대중)’와 ‘프레스티지(Prestige : 명품)’의 합성어로, 비교적 저렴한 명품을 뜻한다.

매스티지는 2003년 등장한 용어다.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시카고 지사에 근무하던 마이클 실버스타인 컨설턴트가 미국 비즈니스 학술지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보고서를 기고하면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등과 같은 클래식 명품 브랜드보다 저렴하지만 헤리티지(과거의 유산)가 있는 브랜드를 뜻한다. 업계에서는 1980년대 이후 설립된 브랜드를 매스티지로 나누고 있다.

신규 매스티지 브랜드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시장에 안착하며 기존의 럭셔리 브랜드를 대체하고 있다. 또한 가격대 있는 브랜드 가운데 유행을 선도하는 브랜드인 ‘신진 컨템퍼러리’도 MZ세대 사이에서 매스티지 급으로 인정받으며 럭셔리 카테고리의 범위기가 넓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몇 해 전부터 고가의 명품을 구매하는 주 고객층의 연령대가 낮아지면서 새로운 수입 컨템퍼러리 브랜드가 전통 명품 브랜드의 인기를 대체하고 있다”며 “기존 1세대 고가 명품 브랜드보다 좀 더 현대적이고 트렌디한 감각이 돋보이는 새로운 브랜드들이 뜨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젊은층은 남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브랜드를 선호한다”며 “같은 돈을 쓰더라도 조금 더 특별한 것, 흔하지 않는 것들을 원한다. 그래서 명품 소비가 꺾이는 과정에서도 매스티지 브랜드에 대한 관심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삼정KPMG 경제연구원은 “럭셔리 시장에 새로 진입한 MZ세대 소비자는 컨템퍼러리 브랜드의 신명품화, 럭셔리 카테고리의 다변화 같은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며 “본인의 과시욕 충족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과거에는 경제력과 자산을 축적한 40대가 명품의 주 소비층이었지만 지금은 2030세대”라며 “이들이 업계 내에서 새로운 경쟁 구도를 만들고 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클래식 브랜드와 현대적 감각과 독창성을 무기로 MZ세대를 공략하는 브랜드 간 대결이 됐다”고 덧붙였다.

매스티지 브랜드로는 아미·르메르·메종 마르지엘라 등이 꼽힌다. 이들 브랜드의 탄생 시점은 100년 내외의 역사가 있는 샤넬·루이비통 등과 달리 10~30년 전이다. 그럼에도 △심플하고 트렌디한 감성 △높은 경제적 접근성 △신선한 로고 등이 인기의 요인으로 꼽힌다.

삼정KPMG는 “신명품 브랜드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며 “‘힙하다’고 표현되는 독창성과 트렌디함을 중시하는 Z세대가 경제력을 가진 소비층으로 부상할 미래에는 신명품이 럭셔리업계의 트렌드를 주도할 가능성도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업계에서도 기존 럭셔리만큼 매스티지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총 7개의 매스티지 브랜드를 확보했다. 주세페 자노티·세이브더덕·릭 오웬스·필립플레인 골프·엔폴드·꾸레쥬·리포메이션 등이다. 실적은 브랜드별로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이들 브랜드 모두 오픈 직후 목표 매출을 초과 달성하는 등 긍정적인 지표가 나오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도 코로나19 사태 이후 플랜씨·스튜디오 니콜슨·가니·자크뮈스 등의 한국 판권을 확보했다. 올해도 다양한 매스티지 브랜드를 확보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현대백화점의 패션 계열사 한섬은 아워레가시·가브리엘라 허스트·토템·베로니카 비어드 등을 새로 론칭했다. 한섬 관계자는 “아직 들여온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매출 집계는 어렵지만 새로 확보한 매스티지 브랜드 모두 예상을 웃도는 호실적을 기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섬은 앞으로도 해외 신명품 브랜드를 발굴해 향후 5년 내 해외 패션 부문의 매출 규모를 현재의 두 배가 넘는 1조원대로 키울 계획이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오프라인 차별화 경쟁도 치열성장 곡선이 완만해지더라도 한국의 명품 시장은 꾸준히 커질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한국의 명품 시장은 2025년까지 연평균 6.7% 성장할 것으로 추정된다. 럭셔리 시계와 주얼리 부문, 가죽 제품과 패션 부문이 시장 성장을 이끌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성장하는 시장을 잡기 위한 명품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는 식음료 ‘F&B(food and beverage)’와의 결합과 매장 리뉴얼이다. 오프라인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체험형 콘텐츠를 적극 확대, 브랜드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지난해 프랑스 명품 브랜드 디올과 루이비통,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가 서울에 F&B 매장을 열었다. 디올은 청담동에서도 ‘카페 디올’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루이비통은 지난 1년간 한국에서만 3번의 F&B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지난 5월 서울 청담동에서 선보인 영국의 제레미 찬 셰프와 협업한 ‘이코이 앳(at) 루이비통’ 매장이다. 20만~30만원대 가격에도 불구하고 주말 예약은 한 달 전부터 마감된다.

이 밖에 프랑스 브랜드 메종키츠네는 현대백화점 판교점·목동점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아페쎄(A.P.C.)는 롯데백화점 동탄점에서 카페를 열었다.

업계 관계자는 “럭셔리 브랜드의 F&B는 충성도 높은 고객들이 있기에 성공할 수 있는 마케팅 방법”이라며 “제품 구매 등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가격에 브랜드에서 제공하는 것들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이 그 값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장 리뉴얼도 진행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서울 소공동 본점 에르메스 매장을 복층 형태로 리뉴얼하고 있다. 기존 1층 매장을 2층까지 확대한다. 매장은 6월 중에 재오픈할 예정이다. 신라호텔에 있는 에르메스 매장도 단층 구조에서 복층 구조로 리뉴얼하고 있다. 매장은 4분기에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도 각각 강남점과 판교점을 중심으로 명품 경쟁력을 강화할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오프라인 매장의 차별화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한국 사람들은 직접 보고 사는 것을 좋아한다”며 “시간을 들여 매장에 들르는 것 자체를 즐긴다. 그들은 제품을 고르고 고민하고 구매하는 전체 과정에 돈을 낸다고 생각한다. 비싸면 비쌀수록 더욱더 그렇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