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 면책 사유 들어 지급 거부
대법원 “자유 의사 결정 할 수 없는 상태”

[법알못 판례 읽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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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아와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보험사가 사망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보험금 지급에 대한 면책 사유의 적합성을 판단할 때 우울증 진단부터 자살 무렵까지 상황 전체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취지다.

1·2심 판결 엇갈려

대법원 3부는 2023년 6월 1일 A 씨의 유족이 보험사를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에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우울증 등의 진단을 받아 상당 기간 치료를 받아 왔고 그 증상과 자살 사이에 관련성이 있어 보이는 경우 상황 전체의 양상과 자살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A 씨는 2012년 2월 일반 상해로 사망하면 보험금 9000만원이 지급되는 보험에 들었다. 우울증을 앓던 그는 2019년 11월 인천 서구의 한 건물 내 계단 난간에 패딩 점퍼로 목을 매 사망했다. 이에 보험 수익자로 지정된 A 씨 부모는 보험사에 사망 보험금 지급을 청구했다.

하지만 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A 씨가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가능한 상태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험사 측은 “피보험자가 심신 상실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에만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면책 사유 관련 보험 약관을 근거로 들었다.

A 씨 부모는 보험사를 상대로 보험금 청구 소송을 걸었다. 이들은 재판에서 “망인은 사망 당시 평소 만성의 우울증을 앓아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며 “만취해 정상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순간적인 우발 행동으로 목을 매 사망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보험사 측은 “망인은 자살에 의해 사망한 것이 분명하고 사망 전 가족들과 통화하는 등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사리 분별력이 있었다”고 맞섰다. 또 “망인이 모친의 가게 입주 빌딩을 선택하고 사망 장소까지 스스로 걸어갔고 술에 취한 상태라는 정확한 자료가 없다”고 덧붙였다.

1심은 원고 승소로 판결 났다. 1심 재판부는 “망인의 사망이 보험 약관상의 면책 사유의 예외에 해당한다”며 원고들에게 9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심 법원은 기존 판결을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A 씨가 사망 직전 가족과 통화하며 ‘미안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등 자신의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인식하고 있었다”며 “자살 방식 등을 볼 때 망인의 자살 기도가 충동적이거나 돌발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2심 재판부는 A 씨의 진료 내역에서 환각·망상·정신병적 착란 증상 등이 보이지 않고 그가 사망한 해인 2019년경 물품 배송일을 하거나 보험회사에 근무하고 모친이 운영하는 김밥 가게를 돕는 등 사회생활을 했다는 점도 자유로운 의사 결정 능력이 결여됐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로 들었다.

우울증 진단~자살 전체 과정 봐야

대법원은 “원심에서 보험 계약 약관 면책 사유의 해석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며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조사 결과 A 씨는 자살 9년 전부터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을 진단받고 자살 1년 전에는 진료를 받으며 우울증이 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담당 의사는 “임상 증상의 호전이 뚜렷하지 않고 병식이 부족한 상태로서 입원 치료 등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자살 무렵에는 신체·경제·사회적 문제로 주변 상황이 극도로 나빠졌다. A 씨는 2019년 물품 배송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2019년 10월까지 진료를 받았고 사망하기 보름 전에는 다니던 보험회사에서 퇴직했다.

또 자살 전날 오후 11시께부터 다음 날 오전 2시 30분께까지 지인 3명과 함께 소주 8병을 나눠 마시고 취해 비틀대고 구토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A 씨를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았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은 또 A 씨가 사망 직전 가족들과 통화한 사실에 대해 “망인이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이후의 사정으로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이번 사건 심리에서 정신 질환 등으로 자살한 경우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사망이었는지 여부를 따지는 사건의 기존 판례를 참고했다. 해당 판례는 “자살자의 나이와 성행, 신체적·정신적 심리 상황, 정신 질환의 발병 시기 및 진행 경과와 정도 및 자살에 즈음한 시점에서의 구체적인 상태를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또 “자살자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 상황과 자살 무렵 자살자의 행태, 자살 행위의 시기 및 장소, 기타 자살의 동기, 경위와 방법 및 태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오랜 기간 우울증 등을 겪은 사람이 자살한 사건에서 그가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 판단할 때는 우울증 진단부터 자살 무렵까지 상황 전체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함을 최초로 판결한 사례”라고 밝혔다.


[돋보기]
최근 판례는 사망 이르는 과정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추세

법원은 보험 약관의 ‘자살 면책’ 조항이 있더라도 사망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의한 자살이 아니라면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판결하는 추세다.

대법원 2부는 2022년 9월 B 씨가 현대해상을 상대로 제기한 사망 보험금 1억원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지법으로 돌려보냈다. B 씨의 모친인 C 씨는 2016년 B 씨를 사망 수익자로 한 교통상해사망 특약보험에 가입했다.

C 씨는 2017년 9월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후 우울증 등 불안 장애를 겪었다. 결국 C 씨는 2018년 5월 극단 선택을 했다. 보험사는 약관상 자살 면책 등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고 이에 유족들이 소송을 걸었다.

1심은 원고 승소로 판결했지만 2심은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은 “C 씨가 교통사고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주요 우울 장애를 앓게 됐고 외상의 부정적 경험을 자극할 수 있는 외부적 상황이 존재하는 중 자살했다”며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군 복무 중 가혹 행위를 당해 극단 선택을 한 군인도 사망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는 판결도 나왔다. 대법원 3부는 사망한 군인 D 씨의 모친이 보험사 2곳을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2022년 12월 서울고법으로 파기 환송했다.

2016년 12월 군에 입대한 A 씨는 이듬해 3월 소속 부대에 배치된 후 선임병들에게 수차례 폭행, 모욕 등을 당했다. 이로 인해 우울증 진단을 받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다가 2017년 8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 사건도 유족과 보험사 간의 보험금 청구 소송으로 이어졌다. 1·2심은 모두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대법원은 “A 씨가 소속 부대원들의 가혹 행위로 인해 지속적인 우울증을 겪고 있었고 이에 따른 극심한 고통으로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하지 못했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단기간에 10건의 생명보험에 가입한 뒤 보험 약관상의 자살 면책 기간인 2년이 지난 이후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도 2022년 5월 나왔다. 이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망자가 보험금을 부정 취득할 목적으로 다수의 보험 계약을 체결했다”며 유족 측의 보험금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망자가 2015년 10건의 보험에 추가 가입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큰 액수의 보험료를 부담하고 있었고 보험 계약 체결 이후 중국에서 상표를 출원하기도 하는 등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통상적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정당하다고 보고 보험사 측의 상고를 기각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