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콘텐츠·물류·바이오 등…‘K-컬처’ 전도사로 앞장
미국에서 누적 투자 6.2조원…지난해 매출 6.9조원, 고용 1.2만 명
이재현 CJ 회장 “문화 산업, 경제 성장 핵심 동력” 강조

CJ. (사진=CJ)
CJ. (사진=CJ)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멜팅팟(melting pot : 용광로)’이라는 단어로 정의됐다. 세계 각지의 이민자를 하나로 모은다는 것으로,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들어오면 모두 녹아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근 멜팅팟은 ‘샐러드 볼’이라는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샐러드 그릇에 담긴 각각의 채소가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어우러진다는 것에 비유한 단어다. 하나가 되길 요구하지 않고 각각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집약된 곳, 그만큼 지역 특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성공하기도 힘든 지역 바로 미국이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전자 등 한국의 대기업들은 미국 시장 성공을 기반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은 이들 기업의 성공한 기반이 됐다.

이 성공의 리스트에 추가할 수 있는 기업이 있다면 CJ다. 미국을 글로벌 사업의 핵심 국가로 설정한 지 5년 만에 매출은 7배 이상 늘었고 해외 매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49%에 달한다.

CJ의 미국 시장 진출 성과는 다른 기업과 달리 제조업 기반이 아니다. 콘텐츠와 식품 등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미국에서 자리 잡았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어진 과감한 투자와 발 빠른 현지화로 이룬 성공이다. 또, 적시에 현지 기업을 인수함으로써 시너지를 확보한 것도 미국 시장에 안착한 다른 대기업과 달랐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중꺾마’다.
케이콘 행사 모습. (사진=CJ)
케이콘 행사 모습. (사진=CJ)
성공 키워드 1-케이콘“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어.”

올 3월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 나온 대사로, CJ의 미국 사업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더 글로리’는 CJ ENM의 자회사 스튜디오드래곤이 만든 콘텐츠로, 미국에서는 공개 하루 만에 인기 순위 3위에 올라서며 인기를 얻었다.

2023년 1분기 넷플릭스 비영어 드라마 글로벌 차트 상위 10위권 작품 기준 전체 시청 시간의 3분의 1은 스튜디오드래곤이 제작한 작품이다.

‘콘텐츠’는 CJ그룹이 미국에서 사업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CJ ENM이 북미에서 문화 기업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도 ‘케이콘(KCON)’의 영향이다.

케이콘은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행사다. K팝 공연에 K-라이프스타일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컨벤션을 융합한 세계 최대의 K-컬처 페스티벌이다. 한국의 대중문화를 글로벌 주류 문화로 만들자는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대표 사업이다.

케이콘은 한 국가의 음악 콘텐츠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에 관한 페스티벌 모델을 제시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은 2015년 케이스 스터디로 케이콘 사례를 소개하면서 “문화 산업은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이다. CJ가 적자를 내면서도 문화 콘텐츠 사업에 지속 투자하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CJ그룹 미주사업 매출 추이. (그래픽=송영 기자)
CJ그룹 미주사업 매출 추이. (그래픽=송영 기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현재 세계에서 한류만큼 성공한 대중문화를 찾기 힘들고 그 중심에 케이콘이 있다’고 보도했다.

CJ그룹은 케이콘에서 주요 공연 외에도 한류 전문가와 현지 유명 인플루언서를 패널로 참가시켜 △한글 배우기 △빌보드 K팝 전문기자 등 패널로 참가한 K팝 저널리즘 △유튜브 채널 시작하기 △전 세계 팬 문화의 변화 토론 △미국 팝 음악과 K팝의 차이 분석 △K-푸드 만들기 등 다양한 주제로 소통하며 K-문화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케이콘의 위상도 해마다 높아지는 추세다. 2012년 미국 어바인 버라이즌 앰피시어터에서 개최된 첫 케이콘은 관객 수 1만 명에 그쳤고 적자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듬해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케이콘의 관객 수는 2만 명으로 늘었고 2015년 LA 케이콘에는 7만5000명의 관객이 몰렸다. 코로나19 사태 직전인 2019년 LA 케이콘에는 10만3000명의 관객이 참여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미국·일본·태국 등에서 총 29만1000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개최 첫해 대비 29배의 성장을 기록했다.

케이콘은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기간을 거치며 온·오프라인 동시 개최로 체험의 경계를 확장했고 지난해 한국·미국·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 4개국에서 개최한 온·오프라인 케이콘 누적 관객 수는 3015만 명에 달한다.

CJ 문화 콘텐츠 기업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3월 이재현 회장은 미국 LA로 가는 비행기에서 함께한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문화야. 그게 우리의 미래야. 단순히 영화 유통에 그치지 않고 멀티플렉스도 짓고 영화도 직접 만들고 음악도 하고 케이블 채널도 만들 거야. 아시아의 할리우드가 되자는 거지.”

이 회장의 신념이자 비전이었다. 당시 한국의 문화 환경은 열악했다. 영화는 일일이 검열을 받아야 했고 서태지의 노래는 검열에 걸려 가사가 없이 출시되기도 했다. 이런 문화 후진국에서 이 회장은 문화 강국을 꿈꿨고 이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 그리고 CJ가 맨 앞에서 이끈 K-콘텐츠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흔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케이콘은 문화 산업의 성장성에 대한 확신과 장기적 비전 그리고 지속적 투자라는 실행이 어우러져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CJ의 상징이 됐다.
미국 한 대형마트 모습. (사진=CJ)
미국 한 대형마트 모습. (사진=CJ)
성공 키워드 2-만두와 슈완스콘텐츠가 미국 시장에 길을 냈다면 ‘식품’은 본격적으로 성과를 낸 사업이다.

그 중심에는 만두가 있다. CJ제일제당은 2011년 CJ푸드빌과 함께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비비고’를 론칭했다. 비비고는 ‘비비다’와 ‘투 고(To-go : 포장해 가져가다)’의 합성어로, 이재현 회장이 브랜드 명칭까지 직접 지을 정도로 애정을 쏟은 브랜드다.

이후 CJ제일제당은 자주, 쉽게, 합리적 비용에 K-푸드를 즐길 수 있는 가공식품 시장에 주력하면서 미국 전략 제품으로 ‘만두’를 선정했다. 세계인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음식이라고 경영진은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만두를 영어식 표현 ‘덤플링(Dumpling)’이 아닌 ‘만두(Mandu)’로 표기한 것은 한국 식문화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CJ의 전략이었다.

또한 미국 소비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미국 주요 유통 채널인 월마트·크로거·코스트코 등에 만두를 비롯한 비비고 제품을 공급했다. 이 공격적 유통망 확대는 만두가 미국 시장에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시장 판도가 바뀌었다. 미국 만두 시장은 25년간 일본 아지노모토에서 만든 ‘링링’의 무대였다. CJ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는 미국 진출 5년 만인 2016년 링링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고 지금까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CJ제일제당 미주 식품사업 매출 추이. (그래픽=송영 기자)
CJ제일제당 미주 식품사업 매출 추이. (그래픽=송영 기자)
비비고 만두는 미국에서 2018년 처음으로 2000억원 매출을 돌파했고 2019년 3000억원을 넘기면서 사상 최초로 미국 매출이 한국 매출을 넘어섰다.

흐름을 탄 CJ의 공격 경영은 이어졌다. CJ제일제당은 미국 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2019년 2월 현지 대형 식품 기업인 ‘슈완스(Schwan’s)’를 인수했다. CJ제일제당에서 추진한 M&A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다.

슈완스는 1952년 미국 미네소타 주에 설립된 냉동식품 전문 업체다. 미국 내 17개 생산 공장, 10개의 물류센터를 보유하고 있고 피자·파이·아시안 애피타이저 등을 대표 품목으로 앞세워 시장에서 네슬레 등 글로벌 식품기업과 시장점유율 1, 2위를 다투는 기업이다.

인수 당시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규모는 물론 2조원에 이르는 인수 가격도 시비의 대상이 됐다. 한국 기업이 미국 기업을 이 정도 가격에 인수한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승자의 저주니, 과도한 베팅이니 하는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경영진의 판단은 분명했다. “인수 가격에 대한 평가는 그 액수 자체가 아니라 경영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이 회장은 인수 직후 슈완스 직원들과 간담회에서 “블로썸파크와 블로썸캠퍼스가 K-푸드로 전 세계에서 1등이 되기 위한 1단계라면, 슈완스 인수는 세계 1등을 위한 2단계 투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감의 근거는 슈완스가 갖고 있는 유통망에 실려 보낼 다양한 제품을 CJ가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대대로 슈완스는 CJ제일제당 미국 사업의 혈관 역할을 했다. 2019년 이전까지는 미국 내 1000여 개의 유통 채널에서만 만두를 공급했지만 2019년 이후 슈완스가 입점해 있는 3만여 개의 모든 유통 채널에 비비고 제품을 입점시켰다.

CJ제일제당의 지난해 북미 식품 매출 4조356억원 중 3조3369억원이 슈완스에서 나왔다. 인수 직후인 2019년 2조1985억원(3~12월 실적)에서 50% 늘었다. 올해도 1분기에만 매출 1조원을 넘겨 CJ 식품 사업의 미국 전초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976억원으로 전년 동기(549억원)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슈완스를 타고 미국 곳곳으로 나가고 있는 비비고 제품 중 효자는 여전히 만두다. 2020년부터 CJ제일제당이 별도 미국 매출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 구체적인 실적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지난해 기준 비비고 만두의 미주(북미+중남미) 지역 매출은 5000억원에 육박한다.

올해 분위기도 긍정적이다. 1분기 기준 미국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채널에서 만두 매출이 46% 늘면서 시장점유율 48%로 1위 지위를 공고히 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