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된 수요 환경 안에서 기존 브랜드 간의 땅 따먹기식 점유율 게임이 이뤄졌던 시장 구도는 이제 종료됐다. 미국·유럽·일본 브랜드의 합산 글로벌 점유율은 일부 높은 이름값을 지닌 일부 브랜드를 제외하고 2020년 이후 70%에서 55%로 추세적 하락을 기록 중이다.
자동차 산업의 지각변동을 만들어 낸 가장 큰 동력은 순수 전기차(BEV) 시장의 부상이다. BEV 소비자의 시각에서는 내연기관 시장에서 장기간 축적해 온 기존 업체의 브랜드 가치는 무용이다. 기존 업체들의 기술적 해자가 소멸되는 BEV 시장의 부상과 제조 그 이상의 영업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BEV 기반 스마트카 시장의 개화 가시성이 높아지며 빅테크, 소비 가전 업체, 스타트업 등 신생 업체들의 도전이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 2022년 신생 업체 중 판매량 톱10의 글로벌 판매 점유율은 이미 5%에 육박하고 정부의 정책 지원 아래 빠르게 BEV의 전환을 실현한 중국 대형 업체들의 약진이 돋보인다.
높은 원가 경쟁력을 갖춘 대형 업체들인 상하이차집단(SAIC)·광치(GAC)·비야디(BYD)·지리(Geely)·체리(Chery) 등을 중심으로 시장 재편이 진행 중이고 2021년부터 경쟁력 있는 중국 브랜드들의 BEV 모델 수출이 가파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내수 시장에서 쌓아 올린 상품성 경쟁력 기반에 유럽·동남아·남미·아중동 등 현지 시장 생산 진출을 구체화 중이며 해외 생산 본격화에 시동을 걸고 있다.
일본 브랜드는 하이브리드(HEV)에 대한 집착과 BEV 대응 부재로 구조적인 점유율 하락이 시작됐다. 2022년 도요타의 글로벌 판매 중 BEV 비율은 0.2%에 불과하며 혼다는 0.7%로 역시 저조한 상황이다. 닛산은 4.3%로 상대적 높은 판매 비율을 기록했지만 전기차 브랜드 ‘리프(Leaf)’의 노후화로 점유율 하락세는 지속 중이다.
미국 브랜드는 BEV 양산 지연으로 내연기관 대비 월등히 낮은 BEV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또한 미국 브랜드는 미국 시장에서의 픽업트럭 모델에 대한 판매 의존도가 높은 상황으로, 제너럴모터스(GM)는 시에라와 실버라도가 전체 글로벌 판매의 22%에 달하며 포드는 F-시리즈가 35%를 구성한다.
미국 브랜드는 미국 승용 BEV 시장에서도 상품성 경쟁력 확보에 실패하고 있고 가파른 BEV 시장 수요 증가와 동떨어지는 판매 성과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미국 BEV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기록 중인 테슬라는 2023년 2분기 중 픽업트럭 모델인 사이버트럭을 출시 예정으로 기존 미국 브랜드의 판매 감소는 이들의 전체 가동률 하락과 실적 악화의 단초가 될 것이다.
테슬라와 중국 브랜드가 부상하면서 야기된 구조적 시장 변화와 근본적 경쟁력 차이가 기존 브랜드의 판매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유럽·일본 브랜드들의 글로벌 판매 점유율이 하락하는 반면 같은 상황에서 보여지는 현대차·기아의 차별화된 영업 성과는 인상적이다. 이는 다른 기존 브랜드들과 달리 상품성 있는 BEV를 대량 양산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현재 현대차·기아는 BEV 대량 양산 능력의 확보와 BEV 영업용 차량 수요의 가파른 회복에 힘입어 내연기관 시장점유율에 근접한 BEV 시장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이는 과거 2020년 상반기와 2022년 상반기에 코로나19 발발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의한 경쟁 업체들의 생산 중단으로 점유율 측면에서 반사 이익을 누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기존 자동차업계가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로 내연기관 시장에서 점유율 이상의 BEV 점유율 확보가 바로 그 조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BEV 원가 경쟁력 강화와 이를 통한 판매 가격 인하, 스마트카 경쟁력 확보가 필요하다. 2025년 현대차·기아는 상품성을 높인 신규 BEV 플랫폼에 기반한 스마트카 역량을 공개할 계획으로, 이 시점에 출시될 BEV 모델들의 상품성이 생존과 성장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김준성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
2022 하반기 자동차·타이어 부문 베스트 애널리스트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