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시장의 특징은 발행 시장과 유통 시장 간 폭이 좁고 거래소 상장과 시장 참여자에 대한 별다른 규제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회사가 (혹은 해당 회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회사들) 규제 회색 지대 영역에서 벤처캐피털(VC)·증권사·운용사·거래소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발행 시장에서 토큰이 생성되면 수 주~수개월 이내에 중앙화거래소(CEX) 혹은 탈중앙화거래소(DEX)에 상장돼 유통 시장에서 거래되는데 이는 전통 금융 시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성이다(상대적으로 유동성이 낮은 장외 시장은 예외로 하자).발행된 직후에도 상장 가능한 토큰주식 회사가 발행 시장에서 주식을 발행한 이후 기업공개(IPO)까지 가서 유통 시장에서 주식이 거래되는데 최소 5년이 소요되는 반면 토큰 발행사는 토큰을 발행하고 거래소에 상장하는 데 적게는 수 주, 길게는 수개월이면 충분하다. 일부 블루칩 토큰은 토큰이 생성되자마자 주요 거래소에 즉시 상장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최근 토큰이 출시된 아비트럼은 토큰이 발행된 직후 주요 거래소에서 일제히 토큰을 상장시키며 유동성을 확보했다.
토큰 발행과 유통이 전통 금융 시장 대비 느슨한 덕분에 과거 수 년간 ‘가상자산 VC’가 인기를 끌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불장’ 직후 콘퍼런스에 가면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개발하는 빌더보다 ‘XX캐피털’이 더 많은 기이한 현상이 연출됐다. 심지어 거래소는 VC 계열사를 만들어 투자한 토큰을 상장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혹은 특정 거래소와 VC가 유착 관계를 맺고 공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가상자산 VC가 발행 시장에서 프라이빗 라운드에 참여해 토큰을 일정한 단가에 구매했다고 하면 이를 거래소에 상장시켜 유통 시장에 풀 때는 보통 프라이빗 라운드 단가 대비 몇 배의 가격에 높게 풀린다. VC에는 리테일 고객을 보유한 거래소가 일종의 투자 회수 창구인 셈인데 사실 기관 물량을 리테일에 넘기는 것은 전통 금융 시장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상자산 VC가 무조건 이기는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가상자산 VC가 10개의 알트코인에 투자했다고 하면 잘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고 +2~4년 정도의 록업 기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또한 VC의 특성상 가상자산 VC 10개 포트폴리오 중 1~2개의 아웃라이어가 나머지 실패한 (잔존 가치 0에 수렴하는) 투자 포트폴리오 손실을 채우는 형식인데 이는 전통 VC의 리스크·리턴 프로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발행 시장에서의 프라이빗 라운드 투자 단가 대비 저렴한 가격에 토큰이 유통 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우도 많다. 만약 가상자산 VC ‘A’가 특정 토큰을 10원에 매수했는데 현재 유통 시장에서 5원에 거래되고 있다면 리테일로서는 기관보다 저렴한 가격에 해당 토큰에 투자할 수 있고 별도의 록업이 없어 투자 회수도 용이한 셈이다. 영리한 리테일 투자자에게 가상자산은 어찌 보면 ‘상대적으로 공평한’ 그라운드일 수 있다.가상자산 VC, 좋은 시절은 지났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앞으로 가상자산 VC의 좋은 시절은 지났다고 보는데 이는 알트코인(김치코인)과 거래소에 대한 규제 강화, 경쟁 심화, 자본 부족, 임직원 역량 미달 때문이다. ‘빠르게 돈을 버는 법’을 추구하며 기존 관행대로 하던 가상자산 VC들은 결국 수년 내 생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애초에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사업을 영위할 의지가 없는 투자사가 많기도 하고 말이다.
한편 거래소 상장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에 가상자산 유통 시장에는 굉장히 미성숙한 단계의 토큰이 유동성을 띠고 거래된다. 유통 시장에서 거래되는 토큰을 투자(liquid token investment)하는 것은 마치 발행 시장에서 VC 와 유사한 리스크·리턴 프로필이라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투자 성적이 모 아니면 도라는 뜻이다.
실제로 BNB·솔라나·폴리곤(매틱)·액시 같은 토큰들은 유통 시장에서 거래된 이후 상장 시점 가격 대비 최대 +100x가 넘었다. 반면 루나(Luna)와 FTT 같은 토큰도 한때 +100x까지 갔지만 지금은 거의 망했고 가격도 폭락한 상황이다. 유통 시장에서 이렇게 벤처 투자에 가까운 리스크·리턴 프로필을 띤 자산군은 가상자산밖에 없다.
현재의 가상자산 유통 시장은 25년 전 닷컴 버블 전후 나스닥과 유사한 수준이다. 당시 나스닥에는 아마존·마이크로소포트 같은 블루칩 주식도 거래됐지만 (IPO 이후 +100x를 실현한 케이스) 지금은 망한 무수히 많은 회사들의 주식 역시 당시에 거래됐다.
나스닥과 인터넷 주식의 역사를 참고하면 현재 유통 시장에서 거래되는 1000종이 넘는 알트코인 중에서 5년 뒤에 살아남을 토큰은 10%도 안 될 것 같다. 다만 극히 소수의 경우 유통 시장에서 거래되는 토큰을 장기 보유하는 것 만으로 +100x라는 경이로운 수익률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대부분 인내하지 못하고 실패할 것 같다. 혹은 비트코인&이더 장기 투자보다 저조한 성과를 내거나 말이다.
마지막으로 요새 드는 생각은, 기존의 가상자산 투자 회사 모델이 산업의 성숙, 전통 투자 회사, 기관 자금의 유입, 규제에 따라 상당히 변화할 것 같다. 기존 가상자산 투자사는 발행 시장 VC 위주였지만 앞으로 유통 시장 투자도 점차 확대될 것 같다. 결국 모든 가상자산 전문 투자사는 VC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유통 시장 투자를 고민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전통 VC가 가상자산 시장에 진입하고 VC 투자 딜 구조가 토큰에서 주식으로 변환됨에 따라 발행 시장 내 VC 경쟁이 심회되고 투자 성공의 난이도가 올라가겠지만 온체인 분석에 기반한 유통 시장 투자 영역은 가상자산 투자 회사 고유의 영역으로 존재할 것이다.
사실 이미 판테라, BH디지털, 디파이언스 캐피털 등 몇몇 해외 가상자산 투자사들은 유통 시장 투자를 내세우는 경우가 있는데 아직까지 뚜렷하게 두각을 보이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체계적인 투자 프레임워크가 없는 곳이 태반일 것이고 수익률도 비트코인 이더 인덱스 대비 저조할 것이다.
향후 가상자산 전체 시가 총액이 5조 달러 이상 커지고 비트·이더·알트코인 간 가격 상관관계가 낮아진다면 유통 시장 투자는 주목받는 영역이 될 것 같다. 온체인 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투자 의사 결정에 활용하고 (마치 전통 금융 시장에서 블룸버그를 활용하듯이)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업무는 기존 주식 투자의 그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VC와는 다소 다른 스킬셋이 요구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기에 HR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중섭 ‘어바웃 머니’, ‘비트코인 제국주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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