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객 늘면서 여행 수지 적자 현실화…‘반도체’ 국가 차원에서 육성하는 일본

[스페셜 리포트]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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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적혀 있는 가격표에 ‘0’ 하나를 더 붙이면 한국 돈으로 환산할 수 있었다. 100엔이 1000원의 가치를 갖던 시대에는 말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엔화가 800원대까지 떨어지면서 이러한 공식은 옛말이 됐다.

오랜만에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부터 항상 투자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개미족까지 모두 ‘엔화’에 주목하고 있다. 엔화 가치가 떨어졌을 때 대량으로 구매하거나 혹은 일본에서의 쇼핑을 통해 보다 저렴하게 물건을 구매하기도 한다.

이처럼 엔화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곳곳에서 기회를 포착하려는 움직임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엔화의 하락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보다 복합적이다. 엔화의 약세로 인해 당장 한국의 수출 경쟁력부터 흔들릴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상반기 투자 키워드는 ‘엔테크’

상반기 투자 좀 하는 사람들이라면 단연 일본 자산을 눈여겨봤을 것이다. 엔화 예금부터 상장지수펀드(ETF), 일본 주식까지 일본과 관련한 투자 상품은 모두 성행했다.

일본 주식 매수 건수는 ‘역대 최다’였다. 7월 3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6월 30일까지 한국 투자자의 일본 주식 매수 건수는 4만4752건으로 전년 동기 2만6272건 대비 70%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 매수 건수는 2011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 최대치였다.

특히 엔저 현상이 절정이었던 지난 6월 매수 건수는 1만4494건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5월에 기록한 직전 최대치인 7757건을 한 달 만에 경신했다.

엔화에 투자할 수 있는 엔화 선물 ETF도 인기를 끌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타이거(TIGER) 일본엔선물 ETF’ 순자산이 600억원을 돌파했다고 6월 23일 밝혔다. 이 상품은 엔·원 환율을 기초로 하는 ‘엔선물지수’를 추종하는데 현재 한국에서 유일하게 엔화 연계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ETF다. 이도선 미래에셋자산운용 ETF운용부문 매니저는 “엔·원 환율이 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일본이 완화적인 통화 정책을 당분간 유지할 방침을 밝히면서 엔테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엔화 예금도 증가세다. 한국은행이 6월 23일 발표한 ‘2023년 5월 중 거주자 외화 예금 동향’에 따르면 지난 6월 한국 거주자의 외화 예금은 967억9000만 달러로 한 달 전보다 54억 달러 증가했다. 이는 지난해 12월 이후 처음으로 증가세로 전환된 것이다.

특히 ‘역대급 엔저’에 따라 엔화 예금 잔액은 4개월 만에 반등했다. 엔화 예금은 6월보다 9억3000만 달러 증가했다. 한국은행은 이를 기업의 해외 직접 투자 자금 일시 예치와 개인의 여유 자금 예치 영향으로 분석했다. 엔화가 쌀 때 사 두자는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투자와 함께 성행한 것은 일본 여행이다. 모처럼 자유로워진 해외 여행길에도 일본을 최우선 여행지로 고려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엔화 하락이 이를 부추겼다는 분석이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 5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 51만5700명이다. 지난 6월 해외로 출국한 한국 여행객 168만3000여 명 중 약 3분의 1이 여행지로 일본을 택했다.

이와 같이 해외로 나가는 한국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여행 수지 적자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여행 수지 적자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의 소비보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쓴 금액이 더 클 경우를 말한다.

실제로 여행 수지 적자 규모는 3년 만에 가장 큰 규모로 불어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여행 수지 적자액은 32억3500만 달러(약 4조2800억원)로 2019년 3분기 32억8000만 달러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적자를 나타냈다.

물론 여행 수지 적자가 일본 여행객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간 한국 관광을 주도하던 중국인 단체 관광객의 회복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것도 원인이다. 즉 한국 국민들이 해외로 나간 만큼 한국에 유입된 외국인 관광객 숫자가 뒷받침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일본을 향하는 한국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여행 수지 적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엔화 약세는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쓰는 소비를 더욱 부추겼다.

지난 5월을 기준으로 한국을 찾는 일본인은 18만4000여 명이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다. 이처럼 여행 수지의 악화는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5월 보고서를 통해 “코로나19 사태 이후 내국인의 일본 등 해외여행 급증의 영향으로 여행 수지 등 서비스 수지 적자가 심화할 것”이라며 “서비스 수지 적자 확대는 전체 경상 수지 악화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가뜩이나 부진한 수출에 ‘엔저’가 미칠 영향

경상 수지뿐만 아니라 엔저의 장기화는 수출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 특히 한국 경제가 수출 위주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더욱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엔저가 우리 수출에 미칠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수출 경합도를 봐야 한다. 수출 경합도는 두 국가 간 수출 유사성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다. 한국과 일본의 수출 경합도는 2015년 0.485에서 2021년 0.458로 약화됐다. 하지만 수출 경쟁이 치열한 품목에서는 여전히 부정적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세부 품목으로 살펴보면 자동차·반도체·전자제품 등은 수출 경합이 약화됐지만 농수산물·생활용품 등은 경합이 격화됐다.

수출 기업과 중간재 납품 업체들은 더욱 불리하다. IBK기업은행 경제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은 중국에 이어 한국이 중간재를 많이 수입하는 국가”라며 “엔화 약세로 일본 중간재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 한국 기업과의 경쟁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여전히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하는 국가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11월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포인트 하락하면 한국 수출 금액이 0.61%포인트 감소한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가뜩이나 수출이 부진한 상황에서 엔화 약세는 남은 하반기 한국 경제도 쉽지 않을 것이란 예측을 더한다.

그간 한국 수출을 떠받쳐 온 것이 반도체였다. 상반기 한국 수출이 부진했던 것도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연일 감산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일본이 반도체를 앞세워 ‘잃어버린 30년’의 극복을 꾀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사안이다.

최근 일본은 삼성전자·TSMC·마이크론 등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또 일본 정부가 직접 정부계 투자 펀드를 활용해 반도체의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세계 1등 기업인 JSR의 매수에 나서고 있다. 전통적으로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에 강한 일본은 투자와 연구·개발(R&D) 지원을 확대하고 일본의 주요 8개 기업들이 출자한 ‘라피더스’로 파운드리를 개발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가장 큰 수혜국이 일본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중국으로부터 제재당한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자 계획을 밝히는 등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에서 일본의 위상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민현정 KOTRA 무역관은 “한국과 일본은 양국 공급망 리스크 대비와 강화책이 공통적으로 반도체와 첨단 기술 분야에 집중돼 있다”며 “향후 일본 소재 부품 기업들의 동향과 정부 정책을 확인하고 관련 분야에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