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곤도 마사히코의 노래 ‘긴기라기니’가 길거리를 장악하고 갤러그가 한국의 오락실을 점령한 것도 1980년대였습니다. 방송도 일본 것을 베꼈습니다. 일본의 전성기였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전성기는 막을 내립니다.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의 버블 경제는 외부 충격과 정책 실패, 잘못된 전략이 어우러져 몰락의 방정식을 완성합니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팔을 비틀어 반도체 산업을 파괴했습니다. 일본은 장기 불황에 들어간 지도 모르고 금리를 올렸습니다. 기업들은 시장 변화를 무시하고 고품질에 집중하다가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일본 업체들 자리의 상당수는 한국 기업들의 차지였습니다. 반도체·가전·자동차 등은 물론 코끼리밥솥 자리까지 쿠쿠가 대체했습니다.
그랬던 일본 경제가 최근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몰락의 방정식은 역으로 작용하며 부활의 디딤돌이 됐습니다. 미·중 무역 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공급망 재편의 필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 국가로 선정한 듯합니다. 워런 버핏은 일본 종합상사에 투자하고 마이크론은 공장 증설에 나섰습니다. 한국과 대만도 미국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양보를 거듭하며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섰고 삼성전자는 일본에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대만 TSMC는 일본 내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정책도 시기적절했습니다. 금리를 올리지 않고 돈을 계속 풀었습니다. 역대급 엔저로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은 강화됐고 이익은 급증했습니다.
또 일본 정부와 증권거래소는 기업들을 압박했습니다. 유보금을 주주 환원에 쓰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 주라고 했습니다. 반도체 기업 유치를 위해 엄청난 보조금도 제시했습니다. 2027년까지 2나노 공정을 완성해 일본 반도체를 부활시킬 것이란 자신감도 내비쳤습니다. 때마침 관광객까지 늘어 일본 경제는 화려한 부활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일본은 디지털 후진국입니다. 몇 해 전 사이버 보안 담당 장관이 USB가 뭔지 모른다고 해 논란이 됐고 일본 관공서는 이제야 플로피디스크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정보기술(IT) 기반이 취약하다는 말입니다. 제로 금리와 엔저의 미래도 불확실합니다. 일본의 국가 부채는 어마어마합니다. 금리를 올리는 순간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그렇다고 물가가 오르는데 마냥 놓아 둘 수도 없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반도체 굴기도 쉽지 않습니다. 반도체 기술도, 인재도 없습니다. 기술 자문을 IBM이 맡는데 IBM은 반도체를 안 한 지 한참 됐습니다. 설령 2027년 2나노 공정에 성공해도 그동안 삼성전자가 손빨고 앉아 있으면 몰라도 더 앞서갈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도 기시다에게 배울 점은 있습니다. 정책의 기술입니다. 계속 돈을 풀고 시기적절하게 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보조금을 내걸어 반도체 부활이라는 쇼를 한 것도 인상적입니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의 자신감을 회복시킨 것은 영리해 보입니다.
일본을 공부하다가 한국을 돌아보게 됩니다. 물가는 오르고 반도체 수출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연체는 늘고 있습니다. 기업들의 이익도 늘지 않고 가계 부채에 대한 경고음은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경제 정책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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