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와 같은 ‘슈퍼 지식재산권(IP)’이 한국의 콘텐츠 산업을 일으키고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 슈퍼 IP는 콘텐츠 한 편에 그치지 않고 시리즈로 제작되는 등 잇달아 변주되며 강력한 팬덤을 만들어 가는 IP를 의미한다. 과거엔 디즈니와 마블 등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주로 슈퍼 IP가 탄생하고 발전해 왔다. 한국에선 ‘신과 함께’와 같은 소수의 작품만이 시리즈 흥행에 성공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영화·드라마 등 장르를 불문하고 한국 콘텐츠업계에서도 속편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나아가 ‘속편은 망한다’는 징크스를 깨고 원작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한다. ‘뒷이야기’란 뜻을 가진 속편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던지고 하나의 독립 콘텐츠로 봐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완성도까지 자랑한다.캐릭터 변주, 뛰어난 기획력에 날개 단 ‘범죄도시’
한국 슈퍼 IP의 기세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특히 방송,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속편이 잇달아 제작되고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방송에선 ‘모범택시2’, ‘낭만닥터 김사부3’, ‘구미호뎐 1938’ 등이 연이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소방서 옆 경찰서’의 시즌2에 해당하는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 ‘경이로운 소문 2’ 등도 방영된다. OTT에서도 ‘D.P.2’와 ‘형사록2’ 등 속편들이 잇달아 나온다. 사실상 올 하반기 콘텐츠 시장은 슈퍼 IP가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슈퍼 IP는 장르물의 발전과 맞물려 대거 탄생했다. 속편은 원작이 아무리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더 제공할 이야깃거리가 마땅히 없으면 제작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르물은 로맨스·코미디 등에 비해 속편 제작이 쉬운 편이다. 개성 강한 캐릭터, 속도감 있는 전개, 다양한 복선 등을 기본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확장하기 좋다. 2016년 이후 한국에 OTT가 활성화되면서 장르물이 다수 제작됐고 이는 슈퍼 IP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속편의 경제적 효과도 뛰어나다. 원작을 좋아했던 고정 팬들이 속편에도 관심을 갖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속편이 나오면 원작을 다시 찾아 보는 사람들도 많아 원작의 주문형 비디오(VOD) 매출도 덩달아 늘어나게 된다. 원작이 큰 인기를 얻으면 속편 제작을 계기로 일정 부분 보상을 받게 되기도 한다.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최고경영자(CEO)는 “시즌1이 잘돼 시즌2가 나오면 그 인기를 더 크게 계산해 보상해 준다”고 말했다.
이같이 성공한 슈퍼 IP들엔 공통점이 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캐릭터의 힘이 강력하다. 대중의 기억에서 쉽게 잊히지 않을 강렬한 캐릭터를 구축해 다양한 이야기로 확대·재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영화 ‘리썰 웨폰’ 시리즈 등을 연출하고 ‘엑스맨’ 시리즈를 기획했던 리처드 도너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속편을 만드는 것은 단지 더 크고 더 멀리 나아가려는 것만이 아니다. 속편은 캐릭터가 끌고 나가는 것이다. 매력적인 인물들 간의 관계로 이끌어 가며 더욱 충성심 강한 관객을 만들어 낸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이 공식에 철저히 부합한다. 맨주먹으로 범인들을 소탕하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힘, 그러면서도 인간미와 유머까지 갖춘 마석도 형사는 이 작품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맞서는 빌런 캐릭터의 매력도 충분하다. ‘범죄도시’는 잔인함을 내세운 장첸(윤계상 분)과 강해상(손석구 분)에 이어 지능형 빌런인 주성철(이준혁 분)까지 다채로운 빌런들로 극을 채워 갔다. 감초 캐릭터들의 활용도와 변주도 뛰어나다. ‘범죄도시3’엔 장이수(박지환 분) 캐릭터를 빼고 초롱이(고규필 분) 캐릭터가 투입됐다. 다음 시리즈엔 장이수가 다시 등장한다. 이처럼 다양한 캐릭터의 변주를 바탕으로 ‘범죄도시’는 관객들에게 볼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나아가 ‘범죄도시’는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으로도 화제가 됐다. ‘범죄도시2’와 ‘범죄도시3’는 단 1년 간격을 두고 차례로 개봉됐다. 콘텐츠가 이토록 빠르게 공급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시리즈 전체를 기획하고 촬영한 덕분이다. 실제 ‘범죄도시’는 총 8편까지 제작되며 대부분 1년 간격으로 개봉될 것으로 예상된다. ‘범죄도시 4’도 내년 개봉을 목표로 한다. 심지어 시놉시스는 이미 8편까지 나와 있다.
과거 한국에선 장기적인 관점으로 시리즈를 제작하는 것이 쉽지 앟았다. 속편의 화력이 원작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연이어 3~4편 등을 기획·제작하는 계획까진 미처 세우지 못했다. 최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속편들을 준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벽을 깨고 탄생한 ‘범죄도시’처럼 장기적인 관점과 전략을 취한다면 슈퍼 IP의 생명력은 더욱 연장될 수 있다. 아무리 탄탄한 팬덤이라고 해도 공백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다시 화력을 붙이는 것이 쉽지 않다. 콘텐츠 트렌드가 빨리 변하는 만큼 그 변화를 따라가기도 어렵다. 하지만 ‘범죄도시’ 시리즈는 시기적절한 콘텐츠 공급으로 더욱 길고 강력한 생명력을 얻어 냈다.이름만 바꾼 ‘누누티비’…슈퍼 IP 발전 저해
슈퍼 IP의 탄생과 강세는 K-콘텐츠의 위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 상반기에만 ‘더 글로리’와 ‘피지컬100’ 등 9편에 달하는 한국 콘텐츠가 넷플릭스 비영어권 콘텐츠 중 시청 시간 1위에 올랐다. 전 세계적인 인기가 입증된 만큼 이 중 다수의 작품들의 속편이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열풍을 일으킨 ‘오징어 게임2’도 제작에 들어갔다.
한편 ‘범죄도시3’의 흥행에 들떠 갈 때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식도 들려왔다. ‘범죄도시3’가 불법 스트리밍 사이트 ‘티비몬’에 올라왔다는 얘기다. 티비몬은 이전에 OTT 콘텐츠를 불법 스트리밍하던 ‘누누티비’가 이름만 바꾼 것이다. 이번에도 티비몬에 ‘범죄도시3’뿐만 아니라 다수의 OTT 콘텐츠가 올라왔다.
많은 제작비와 노력이 들어간 작품들이 무분별하게 소비된다면 장기적으로 시장 생태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슈퍼 IP를 보호하고 키워 나가기 위해선 올바른 감상 문화가 필수적이다.
슈퍼 IP의 대표 사례로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된 ‘해리포터’ 시리즈가 꼽힌다. 이 작품이 책으로 발간된 1997년부터 완결된 2007년까지 창출한 경제적 효과는 308조원에 이른다. 2007년 당시 한국의 반도체 수출 총액 230조원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잘 만든 슈퍼 IP의 엄청난 효과와 화력을 체감하게 됐다. 앞으로 보다 다양하고 강력한 슈퍼 IP를 키워 나가려면 그에 걸맞은 환경과 문화를 조성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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