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플러스의 드라마 '무빙' / 사진=디즈니
디즈니 플러스의 드라마 '무빙' / 사진=디즈니
500억원 규모의 대작이 찾아온다. ‘한국형 히어로’를 표방한 드라마 ‘무빙’으로 오는 9일 공개된다. 아무리 드라마 제작비가 치솟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 시장에서 500억 텐트폴(많은 제작비가 투입되고 제작사의 수익을 보장할 만한 주요 대작)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2019년 tvN에서 방영된 ‘아스달 연대기’ 이후 둘째다. 거액의 제작비가 들어간 만큼 출연진도 화려하다. 류승룡·한효주·조인성·차태현·류승범 씨 등이 나온다. 회차도 총 20부작에 달한다.

이 작품은 제작비뿐만 아니라 다른 점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되기 때문이다. 2021년 한국에 들어온 디즈니플러스는 그동안 고전했다. ‘카지노’를 제외한 다수의 오리지널 콘텐츠가 특별한 관심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티빙·웨이브 등 한국 OTT 플랫폼에도 밀리는 모양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 지사의 오리지널 콘텐츠팀 해체설까지 돌고 있다. 결국 ‘무빙’의 성패에 따라 디즈니플러스의 한국 사업 향방이 결정될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그런데 디즈니의 위기는 한국 내, 디즈니플러스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콘텐츠 제국 월트디즈니컴퍼니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디즈니플러스 적자, 영화 흥행 부진,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이후에도 되살아나지 못한 디즈니랜드까지 전 사업 영역에 걸쳐 총체적 난국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상반기 7000여 명에 대한 구조 조정까지 했지만 제자리를 찾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도대체 디즈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위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달콤한 꿈에 취해 둔 패착, 플랫폼
그 원인을 찾다 보니 한 인물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웃음은 유행을 타지 않고 상상력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꿈은 영원하다.” 한 세기에 걸쳐 전 세계 사람들을 ‘꿈과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 월트 디즈니(1901~1966년)가 한 얘기다. 정말 멋진 말이지만 사람이 아닌 콘텐츠 기업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콘텐츠 기업은 시시각각 유행을 타는 사람들의 웃음과 마음을 파악해야 하고 상상력은 더 젊어져야 하며 달콤한 꿈에 계속 취해 있어선 안 된다. 디즈니는 어쩌면 그 오류를 범해 왔는지 모른다.

물론 디즈니는 100년 동안 어느 콘텐츠 기업도 해내지 못한 찬란한 영광을 누렸다. 1923년 설립된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부터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피노키오’, ‘미녀와 야수’, ‘알라딘’까지 다양한 애니메이션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미국 대공황 때는 ‘아기 돼지 삼형제’의 주제곡 ‘누가 크고 나쁜 늑대를 두려워하냐’로 큰 위로와 용기도 심어 줬다.

과감한 인수·합병(M&A)으로 성장도 거듭했다. 2006년엔 픽사를 인수하며 ‘토이 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소울’, ‘엘리멘탈’ 등을 만들었다. 2008년 마블을 인수, ‘어벤져스’ 시리즈 등 수많은 히어로물을 탄생시켰다. 2012년엔 ‘스타워즈’ 시리즈로 유명한 루카스필름, 2019년엔 미디어 기업 21세기폭스까지 인수하며 콘텐츠 제국을 완성했다.

디즈니는 ‘무빙’과 같은 텐트폴 전략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이기도 하다. 디즈니는 5년 이상의 단위로 텐트폴 콘텐츠 제작 계획을 촘촘히 세우고 긴 시간을 투자해 흥행 몰이에 나선다. 디즈니가 텐트폴 전략으로 성공한 후 미국·유럽 등 주요 제작사들이 디즈니를 벤치마킹했다.

하지만 수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패착을 하나 뒀다. ‘플랫폼’이라는 강력하고도 거센 ‘변화’에 둔감했던 것이다. 넷플릭스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것은 2007년이었다. 오리지널 콘텐츠 ‘하우스 오브 카드’로 전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2013년이었다. 하지만 디즈니가 OTT 사업에 진출한 것은 한참 후인 2019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디즈니는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공급하기만 했다. 그러다 뒤늦게 자체 플랫폼을 갖추게 됐다. 온라인으로 콘텐츠를 보는 감상 패러다임의 변화, 그 편안함을 즐기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간과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20세기 문화 권력의 상징인 디즈니가 21세기엔 넷플릭스에 문화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플랫폼에서 먼저 승기를 잡은 넷플릭스는 이를 무기로 콘텐츠 영역까지 사업을 대폭 확장했다. 결국 지금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주요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공급되고 있다.원칙과 초심 잃었나…콘텐츠마저 휘청
디즈니의 영화 '인어공주' 한 장면 / 사진=디즈니
디즈니의 영화 '인어공주' 한 장면 / 사진=디즈니
콘텐츠 제국의 핵심인 콘텐츠 영역에서도 디즈니는 흔들리고 있다. 지난 5월 개봉된 ‘인어공주’를 포함해 ‘토르 : 러브 앤 썬더’,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 등 디즈니가 최근 1년간 낸 8편의 영화는 9억 달러(약 1조1506억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특히 ‘인어공주’의 흥행 참패는 디즈니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이 작품은 디즈니가 야심차게 내놓은 실사 영화다. 하지만 과도한 ‘PC주의’ 논란에 휩싸이며 타격을 입었다. PC주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영문 약자다. 인종과 성별 등 다양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디즈니는 과거 콘텐츠 안에 백인 우월주의 등 차별적 요소를 담았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 왔다. 이후 디즈니는 이 비판에서 벗어나 좋은 사회적 가치를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흑인과 여성 주인공 등을 내세운 작품이 늘어난 것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작 훼손 논란이 함께 일었다. 인어 공주 역을 맡은 할리 베일리는 흑인 배우인데 원작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좋은 의미를 최대한 담으려고 하다가 ‘실사 영화는 원작과 최대한 높은 싱크로율로 만든다’는 콘텐츠 제작의 원칙을 놓친 것이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마블 히어로물에도 비상이 걸렸다. 마블 히어로물은 디즈니 텐트폴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콘텐츠였다. 대규모 제작비를 쏟아부어 화려한 스케일의 작품을 선보였고 사람들은 감탄하며 작품을 즐겼다. 하지만 ‘어벤져스 : 엔드 게임’ 이후 디즈니의 히어로물은 하락세를 이어 가고 있다. 밥 아이거 디즈니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마블 시리즈의 제작 편수와 예산 지출을 줄이고 있다고 밝혔다. 아이거 CEO는 “영화 제작량을 늘리고 TV 시리즈도 많이 만들게 되면서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텐트폴(tent pole)의 원래 의미는 ‘텐트를 세우는 기둥’을 뜻한다. 이 기둥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이, 높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견고함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으며 디즈니는 휘청이게 됐다.

디즈니가 초심을 잃은 듯한 부분도 나타나고 있다. 디즈니의 테마파크 디즈니랜드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무료 편의 시설을 없애고 가격을 인상했다. 이에 따라 아이들로 가득하던 긴 줄이 사라져 버렸다. 최근 평균 대기 시간은 27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디즈니의 위기는 한국 콘텐츠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K-콘텐츠 열풍에 취해 가던 중 한국 기업들에도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특히 OTT와 영화계는 제작비 상승, 수요 감소 등과 맞물려 적자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위기를 극복할 해답은 초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월트 디즈니는 “내 모든 것이 꿈과 생쥐 한 마리로 시작됐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고 말했다. 디즈니의 위기 역시 사람들의 마음에 집중하고 위로를 안겨 주려고 했던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점차 해소될 것이다. 한국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한류의 기적을 만들어 낸 초심으로 돌아가 사업을 전면 재정비하고 사람들의 마음과 시대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