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파면 사유 안 돼” 전원일치
탄핵소추 167일 만에 결론
헌재의 결정으로 이 장관은 직무정지 167일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헌정 사상 첫 국무위원 탄핵소추가 무산되면서 정치권에선 재난의 책임을 정부의 어느 공직자한테까지 물을 수 있는지를 두고 더욱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파면 결정할 중대 위법 없다”
헌재는 2023년 7월 25일 서울 재동 헌재 대심 판정에서 열린 이 장관 탄핵 심판 선고 재판에서 “헌법과 법률의 관점에서 피청구인(이 장관)이 재난안전법과 공무원의 성실 의무 등을 규정한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했다거나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헌법상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 장관이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데 책임이 있는지를 두고는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특정인에 의해 (사고가) 발생·확대된 것이 아니다”며 “각 정부 기관이 대규모 재난에 통합 대응하는 역량을 기르지 못한 점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에 규범적 측면에서 이 장관에게 책임을 돌리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태원 참사는 핼러윈을 이틀 앞둔 2022년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길에서 사람들이 넘어져 159명이 사망하고 320명(행정안전부 집계 기준)이 다친 대형 사고다.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재난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의 수장인 이 장관도 사고에 책임이 있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이 지난 2월 8일 이 장관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찬성 179표로 통과시켰다.
헌재는 이번 탄핵 사건의 쟁점을 이 장관의 △사전 재난 예방 조치 의무 위반 △사후 재난 대응 조치 의무 위반 △참사 발생 이후 부적절한 언행으로 압축해 심리했다.
이 장관 측과 국회 측은 네 차례 공개 변론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5개월여간의 숙고 끝에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유남석·이은애·이종석·이영진·김형두 재판관)은 이 장관이 세 가지 쟁점에서 모두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 재판관은 “(이태원 참사는) 재난안전법령상 주최자 없는 축제의 안전 관리 및 매뉴얼의 명확한 근거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고 재난 상황에서의 행동 요령 등에 관한 충분한 홍보와 교육, 안내가 부족했던 점이 총체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봤다. 그러면서 “재난 대응의 미흡함을 이유로 (이 장관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규범적 심판 절차인 탄핵 심판 절차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일부 재판관은 이 장관이 몇몇 법률을 위반했다고 봤다. 김기영·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은 “이 장관은 참사 발생을 알게 됐을 때부터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귀중한 시간을 최소한의 원론적 지휘에만 허비해 재난 대응 과정에서 국가공무원법상 성실 의무를 위반했다”고 밝혔다.
참사 후 “인력을 미리 배치했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는 등 논란을 일으킨 발언들에 대해서도 “국가공무원법상 품위 유지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 같은 행위가 파면까지 해야 할만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봤다.
이 장관은 헌재 결정 후 곧바로 업무에 복귀했다. 그는 성면문을 내 “지난 6개월간 국정 중추 부처인 행안부의 장관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할지 많이 고심했다”며 “천재지변과 신종 재난의 관리 체계 및 대응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지방 시대를 열어 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재난 정쟁’ 가열되는데 ‘예방 입법’은 잠잠
이 장관 탄핵 심판이 기각되면서 정치권에선 ‘재난의 정치화’ 경향이 더욱 강해진 분위기다. 헌재의 결정 후 대통령실은 곧바로 “거야(巨野)가 탄핵소추권을 남용하는 반헌법적 행태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도 “민주당은 재난 안전 주무 부처인 행안부의 손발을 묶어 정작 재난 상황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민주당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또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작금의 현실이 참담하다”며 맞섰다.
책임론을 둘러싼 정쟁(政爭)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지만 국회에선 정작 이태원 참사 같은 대형 재난을 막기 위한 법안들이 오랫동안 계류돼 있다.
행정안전부는 이태원 참사 직후 핼러윈 축제처럼 ‘주최자가 없는 행사’도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도록 하는 재난안전법 개정안을 의원 입법으로 추진했지만 아직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밀집된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의 행렬로 발생한 사고를 ‘사회 재난’으로 규정하는 재난안전법 개정안 역시 국회에 머무르고 있다.
수해 예방 관련 법안들도 지속적으로 발의됐지만 입법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상황이 그다지 개선되지 않은 채 올여름에도 폭우 피해가 잇따랐다. 지난 7월 집중 호우로 충북 청주시 오송읍에서 지하 차도가 침수돼 14명이 사망했다.
[돋보기]
‘오송 지하차도 참사’ 책임 공방도 한창
지난 7월 24명의 사상자를 낸 오송 궁평2지하차도 터널 침수 사고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를 둘러싼 공방도 점점 가열되고 있다. 이 사고는 지하 차도 인근의 강이 범람할 위험을 막아줄 제방 설치와 폭우가 내릴 때 도로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발생한 인재(人災)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무조정실은 7월 28일 청주시 관계자 6명, 충북소방본부 관계자 5명 등 18명을 대검찰청에 추가로 수사 의뢰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으로만 수사 대상에 오른 사람만 36명에 달한다.
국무조정실은 궁평2지하차도 인근 미호강에서 ‘오송~청주(2구간)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미호천교 아래 제방을 무단 철거하고 임시 제방을 쌓은 것과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제대로 감시·감독하지 못한 것이 사고 원인이 됐다고 봤다. 또한 사고 당일 112와 119에 임시 제방이 무너질 수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지만 필요한 조치가 전달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고 결론 내렸다.
관가 등에선 이상래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이우종 충청북도 행정부지사, 정희영 청주흥덕경찰서장, 신병대 청주시 부시장 등이 문책 대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방문규 국무조정실장은 추가 수사 의뢰 사실을 발표하면서 “기관별로 지휘 감독 책임이 있는 관리자의 인사 조치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형사 처분을 받게 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2022년 1월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르면 터널 구간이 100m 이상인 지하 차도, 3차로 이상의 터널 등 공중 이용 시설에서 설계 및 관리 결함으로 한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2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10명 이상 나오면 중대 시민 재해로 보고 이 시설과 관련한 중앙행정기관의 장이나 지방자치단체장 등을 처벌할 수 있다.
궁평2지하차도의 터널 구간 길이는 430m다. 수사 결과에 따라 미호천 개축 공사를 맡은 행복청과 궁평2지하차도의 침수 위험도를 가장 낮은 3등급으로 평가한 충청북도 고위직이 중대재해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중대재해법 위반으로 공직자가 처벌받은 사례는 없다. 지난 4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교 붕괴 사고와 관련해 경찰이 성남시장 등에게 적용할지를 검토하고 있지만 아직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은 상태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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