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라고 하면 누구나 희대의 호색한을 떠올린다. 바람둥이의 대명사가 된 그의 이름을 내건 영화만도 18편에 달하지만 스파이·탐험가·수학자·문필가·사업가로서의 그의 다면성을 조명하는 작품은 별로 없다.
충실한 사랑 대신 극적인 로맨스를, 결혼의 신성함을 비웃으며 폴리아모리(polyamory)를, 애국과 민족주의를 버리고 개인주의를, 정주를 거부하고 끝없는 이주를, 합리적 투자를 마다하고 도박을, 전통과 윤리를 무시하고 자유주의와 쾌락을 택한 지아코모 카사노바.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인 그는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18세기 유럽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그 족적 중 하나가 프랑스 엘리트 사관학교 복권이었고 그 사관학교를 졸업한 나폴레옹은 19세기 초 유럽을 평정한다.카사노바 팬덤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그는 유럽이 꿈꾸던 코스모폴리탄이자 디오스서스(Dionysus)의 화신이었다. 낭만과 스릴로 가득 찬 그의 인생은 범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그가 뿌린 숱한 염분은 살롱과 커피 하우스의 고정 메뉴가 됐다.
출중한 외모의 소지자가 아님에도 이른바 ‘뇌색남’으로 인기를 구가한 배경에는 철학에서 오컬트(Occult)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 유럽 각지를 종횡무진하며 쌓은 독특한 경험, 청산유수의 입담이 있었다. 프리메이슨(freemasonry)의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벤저민 프랭클린, 예카테리나 2세(러시아의 캐서린 대제), 마리 앙투아네트 등 당대 주요 인물들과 교류했다.
그의 명성에 기여한 또 하나의 요인은 ‘범죄’ 행각이었다. 타고난 도박꾼이었던 그는 채무 관계로 수차례 수감됐다. 우상 타파와 종교적 회의론을 표방해 신성 모독과 이단 혐의로 기소된 바도 있다. 또 방대한 궁정 커넥션 덕에 첩보원이라는 누명을 쓰거나 외교적 음모에 연루된 이력도 지닌다.
심지어 변장술에도 능해 수차례의 탈옥 경력도 보유했다. 악명 높은 베니스의 피옴비(Piombi) 감옥에서 1년 만에 탈옥한 그의 수완과 담력에 유럽은 갈채를 보냈다. 일견 ‘잡범’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신비로운 그의 행보에 대한 세인들의 팬덤은 확고했다.
탈주자 카사노바를 품어준 나라는 베네치아 공국과 앙숙 관계에 있던 프랑스였다. 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계몽주의 사상가 데니스 디드로와 볼테르를 벗하게 된다. 그리고 곧 이 철학자들을 아끼고 후원했던 마담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와 조우한다. 카사노바 초상화 (더타임스)왕립 사관학교 복권
마담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절친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린 루이 15세는 지적이고 예술적인 그녀에게서 위로 받았고 국정의 상당 부분을 그녀의 조언에 의지했다고 한다. 결국 18세기 중반 프랑스 왕실 재정의 실권자로 부상한 그녀는 1757년 왕립 사관학교 복권(Loterie Royale de l’École Militaire) 도입을 주도하게 된다.
프랑스 왕립 사관학교 복권은 1757년 10월 15일 루이 15세의 칙령으로 반포됐다. 군사 학교 설립용으로 도입된 사상 첫 복권이었고 당시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구매한 티켓 수와 베팅 금액에 따라 상금이 달라지는 방식 또한 전무후무하다.
카지노에나 어울릴 법한 이 복권에는 당시 도박의 성지였던 베니스에서 망명한 카사노바의 뇌구조가 투영돼 있다. 시대의 결을 거슬러 온 그의 삶처럼 복권을 대하는 그의 시선 또한 남달랐다. 상금을 낮게 책정하면 국가 재정의 취약성을 간접적으로 노출하는 꼴이니 오히려 초대형 상금으로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무려 1억 리브르(프랑)의 상금을 내걸자는 카사노바의 ‘망발’에 왕실 재정관들은 경기를 일으켰다. 프랑스 경제사 연구자 로버트 크루케버그는 당시 카사노바의 응수를 이렇게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현혹이지요. 거액의 상금을 듣는 순간 구매자들은 그 많은 상금을 어디에 쓸 것인지부터 상상할 겁니다.”
사실 재무적 고려보다 소비자 심리를 앞세운 그의 접근법은 현대 마케팅의 정석과 맥을 같이한다. 물품 자체보다 디자인이나 포장, 선정적 광고나 파격적 프레임이 중추라는 것은 현대인의 상식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그의 센세이셔널리즘은 도발을 넘어 도박으로 여겨졌다.
카사노바는 한 걸음 더 나갔다. 초기 추첨에서 왕실이 큰 금액을 잃는 것이 성공의 비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불행이죠”라며 역발상을 내세웠다. 복권위원회의 마음을 돌린 것은 18세기의 또 다른 ‘히트 상품’인 보험에 대한 비유를 들은 후였다.
그의 논지는 이랬다. 성공한 보험회사는 재난으로 인한 피보험자의 손실에 대해 과할 만큼 큰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것. 이렇듯 보험회사가 자신의 경제적 ‘손실과 불운’을 증명해야 더 많은 가입자가 몰리고 결국 확실한 이윤을 챙길 수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거대 상금에 따른 왕실의 손실이 있어야만 복권 구매가 촉진되고 결국 손익 전환이 가능하는 것. 18세기 프랑스 왕립 사관학교 전경(Paris Balade)
7년 전쟁과 퐁파두르 부인
사실 사관학교 설립은 1751년에 이미 이뤄졌다. 5년이 지난 1756년 복권 도입을 논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게다가 운영 자금 마련이란 빈약한 명분에 비해 제시된 복권의 규모와 목표는 지나치게 컸다. 뒷배경을 살펴볼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1756년은 유럽의 운명을 가른 7년 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20세기 이전에 벌어진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명명되는 이 전쟁은 유럽 내 주도권을 넘어 전 세계 식민지 경영권이 걸린 생사의 도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기 대규모 동맹을 형성했는데 열세에 처한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 자금은 물론이고 자국민들의 애국적 지지가 절실했다. 무력감에 빠진 귀족들의 충성과 헌신을 자극할 방안도 도모해야 했다.
왕립 사관학교 복권은 난국의 해법으로 제출됐다. 재정 문제를 넘어 애국과 단결, 범국민적 결기를 모아 갈 캠페인으로서 충분한 모멘텀을 갖춘 기획이었다. 카사노바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복권 위원회에는 퐁파두르 부인 외에 왕궁 재정 담당관 니콜라스 드 불롱네와 금융권 실세 파리스 뒤베르니가 있었다. 극도로 보수적인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던 퐁파두르 부인의 눈에 카사노바가 포착됐다. 출중한 판단력과 빼어난 수리력 그리고 유려한 언변까지 대항마로서 지녀야 할 최적의 자질을 그에게서 봤다.
아니나 다를까. 복권위원회에 초청된 카사노바는 경주마처럼 질주했다. 달리는 말은 카사노바였지만 그 위에 올라탄 기수는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그의 견해에 찬동하는 조련술로 목표를 손쉽게 달성했다. 카사노바는 노련한 재무가들을 제압했고 결국 복권은 그녀의 생각대로 설계됐다.
하지만 어쩌랴. 1759년까지 3년 동안 성공적으로 진행된 복권 수익 1200만 리브르(프랑)는 7년 전쟁의 포화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패전한 프랑스는 1763년 캐나다 동부, 미국 미시시피강 동부, 캐리비안제도 전체, 인도 점령지 전체를 영국·스페인·네덜란드에 양도해야 했다. 그렇게 대영제국 시대가 막을 열렸다.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NPR) 그 후
사관학교 복권 운영으로 자신감을 얻은 프랑스 왕실은 1776년 모든 복권을 통폐합해 프랑스 왕립 복권(Loterie Royale de France)으로 일원화했다. 단 카사노바의 접근 방식과 공식은 그대로 계승했다.
복권과 함께 세력을 키운 애국주의 에너지는 왕정 폐지와 공화정 확립이라는 정치 운동과 결합하면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동력이 됐다. 한편 나폴레옹을 비롯한 출신 엘리트들은 설욕전을 꿈꾸며 19세기 초 유럽 정복에 재도전하지만 결국엔 쫄딱 망하고 만다.
X버릇 남 주지 못한 카사노바는 성추문과 채무 불이행으로 1760년 프랑스에서도 추방됐다. 그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보헤미아다. 그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이름이자 지역이다. 프랑스어로 쓴 회고록 ‘내 인생의 역사(Histoire de ma vie)’는 1781년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수많은 언어로 출간됐다.
스티븐 스티글러 시카고대 교수는 2022년 저서 ‘카사노바의 복권’에서 그의 수리 통계적 안목을 마케팅 지략보다 높이 평가했다. 추첨마다 왕실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 그 위험은 정밀하게 계산됐고 장기적 수익에 대한 통계적 확신에 근거했다고 진단한다.
복권을 “국가 재무 리스크의 의도적 과장으로 운영되는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규정한 스티글러 교수는 “불공정 게임의 합리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 카사노바가 개입한 왕립 사관학교 복권이라고 결론지었다.
최정봉 문화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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