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났지만 여전히 에어컨 없이는 살기 어려운 여름이다. 아무리 온난화를 넘어 열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에어컨 바람에만 의지하자니 냉방병이 가만두지 않는다. 옛날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여름을 났던 걸까. 생각도 잠시. 한옥에 가면 뜨거운 햇빛 속에 움츠러들었던 진짜 바람이 ‘살랑’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은 여유를 선사한다. 서촌 숨은 명소 홍건익 가옥에서 말이다. 서울시 민속 문화재 제33호
경복궁역 1번 출입구로 나와 사직동주민센터로 가는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홍건익 가옥을 만날 수 있다. 가옥은 작은 꽃집과 카페 사이에 자리해 있다. 하지만 골목 안쪽에 있어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이곳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그럴까. 골목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한옥을 발견하자마자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그런 이상한 한옥집이다.
홍건익 가옥의 대문에 들어서기 전 이 가옥의 정체 등이 담긴 설명문을 볼 수 있다. 이곳은 1934년에서 1936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홍건익이라는 상인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는 상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느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35년 전후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시간을 지나며 이 집이 탄생했다. 우리 것을 지키는 동시에 강제로 근대화돼야만 했던 그 시간을 이 한옥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실제로 홍건익 가옥은 전통 한옥과 근대 한옥의 특징 모두를 갖추고 있다. 이에 건축적 가치는 물론 건축 당신의 기본 구조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 등을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민속 문화재 제33호에 지정됐다. 사진 : 홍건익 가옥 제공 특별한 한옥의 세계
홍건익 가옥은 대문채·행랑채·사랑채·안채·별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사랑채 중문으로 바깥채와 안채의 생활 공간이 나뉘고 안채 협문과 일각문이 후원과 집을 구분한다. 특이하게도 일각문·우물·후원이 있다. 일각문은 기둥을 2개만 둔 작은 출입문을 말한다. 홍건익 가옥은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 유일하게 일각문·우물·빙고를 갖춘 곳이다.
홍건익 가옥의 신기한 점은 후원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땅을 깎지 않고 언덕을 그대로 살려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해 각 건물들을 배치했다. 사랑채를 지나 안채·별채까지 돌아보는 내내 오랜 모습 그대로, 그리고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유지한 이곳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사진 : 홍건익 가옥 제공 사랑방에 모여 볼까요
한옥이라는 단어는 1975년 국어사전에 처음 등재됐다. 오래된 집인 만큼 꽤나 오래전에 등재됐을 것만 같지만 사실 이전에는 주거 공간이 대부분 한옥 형태였기 때문에 굳이 한옥이라는 단어를 정의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현대에 주택·아파트·빌라·오피스텔 등 다양한 주거 공간이 생기면서 과거의 건축 양식을 가진 주택을 ‘한옥’이라고 이름 붙이게 됐다.
한옥이 현대 건축물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사랑채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는 건물로, 집주인이 취미를 누리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다. 접대에 매우 친화적인 우리의 고유 문화로 볼 수 있다. 사랑채는 외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홍건익 가옥 역시 사랑채의 쓰임을 다하기 위해 누구나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서울시 공공 한옥으로 이용되고 있어 서울한옥포털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사랑채를 이용할 수 있다. 공간 이용료는 무료다. 최대 2시간 동안 적게는 4명, 많게는 10명이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안채·별채 등은 전시·클래스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민화 그려 보기, 한지 꽃 만들기 등으로 구성된 클래스는 가옥을 배움의 향기로 가득 채웠다.
지나가던 우리에게 잠시 들러 쉬어 가라고 손짓하는 홍건익 가옥. 오늘날 우리에게 작은 쉼터를 마련해 준 잘 알려지지 않은 그분, 홍건익 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이민희 기자 min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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