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연의 다시, 연결]
“감정 노동…존엄을 짓밟혔습니다”[안주연의 다시, 연결]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화성시에 거주하는 30대 싱글 맘입니다. 콜센터 상담원을 하고 있고 이 일을 한 지는 제법 오래됐습니다. 최근에 고인이 된 선생님의 서이초 사건을 보면서 저도 우울한 생각이 들어 사연을 보내게 됐습니다.

한 달 전쯤 평소처럼 상담하고 있었는데 남자 고객이 연결됐습니다. 지난번 다른 상담사에게 무얼 요청했는데 그게 잘 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민원이었어요. 고객의 니즈가 불명확해 어떤 요청이었는지, 언제쯤 통화했는지 재탐색했는데 그때부터 느닷없이 제게 온갖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전화 연결되고 욕이 시작되기까지 불과 1분도 채 안 걸렸을 만큼 느닷없이 욕이 시작됐습니다. 결국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상담 진행이 어려워 먼저 종료하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상담원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전화를 끊어선 안 되지만 딱 두 가지 상황에 한해 먼저 끊을 수 있는데 성희롱을 당하거나 욕설이 계속될 때에 한해 정해진 응대 스크립트를 구사하고 먼저 끊으면 민원전문팀에서 다시 전화가 나갑니다(블랙리스트의 경우 끊어도 되지만 이마저도 정해진 응대를 하고 끊어야 합니다). 회사에서는 저를 보호해 준다고 했지만 제가 너무 놀라 정해진 스크립트를 제대로 응대하지 않은 점은 탓했습니다.

상담원으로서의 직업의식 이전에 제 인간적인 최소한의 존엄도 지킬 수 없는 것인지 정말 그때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일 이후 사소한 것에도 화가 너무 납니다. 제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이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영주(가명) 님, 안녕하세요.

일하면서 느낀 괴로움을 솔직하게 적어 보내 줘 감사합니다. 플랫폼이나 콜센터에서 감정 노동을 하는 직장인들이 많은데 함께 공감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연입니다.

편지 속에서 표현된 영주 님의 모습을 그려 봤습니다. 개인으로 보자면 동료들과 어려움도 나누고 바쁘게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워킹 맘이 떠오릅니다. 콜센터 상담원이라는 직업인으로서는 직장의 제반 조건이 열악한 편이지만 그동안 크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고객들의 불편 사항을 들어 주고 해결해 주며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는 등 직업 효능감과 직무 몰입도가 높은 분이 그려집니다.

주변의 낮춰 보는 시선, 3D 직무, 낮은 보수, 감정 노동 등의 단점으로 다른 길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어떤 직업도 힘들지 않은 것은 없다는 깨달음과 향후 관리자나 강사로서의 진로 발전도 고려하면서 이 일로 돌아오셨습니다. 글을 시작하며 힘줘 드리고 싶은 얘기는 영주 님은 직업에 대한 과도한 이상화나 무조건적인 불평보다 현실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안정적으로 일해 온 자기 결정력이 있는 인재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그 통화를 하게 됐습니다. 이전 상담 처리가 잘 안 됐다는 한 남성 고객의 민원이었고 영주 님은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추가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 바라는 바를 탐색하는 고객과의 협업적 대화를 시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질문의 의도가 전달되기도 전에 고객은 영주 님에게 느닷없이 심한 욕설을 계속 퍼부었습니다. 필요한 프로토콜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언어 폭력을 경험한 것은 영주 님의 직업적 자부심과 직무 몰입에도 큰 타격을 줬을 겁니다.

크게 당황했지만 영주 님은 몇 가지 응대를 하셨습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여쭤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는 요청을 했고 계속 이어지는 (지면에 쓰지 못하는 원색적인) 욕설과 비난에 “고객님 계속 욕설하시면 상담이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상담 진행이 어려워 먼저 종료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그리고 이 통화에 대해 바로 보고 조치도 합니다. 저는 영주 님이 더할 나위 없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사는 영주 님의 스크립트 대응에서 미숙함이 있다는 부분만 지적했습니다.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대접받는 것은 자존감에 중요합니다. 자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사회적 권리가 있는 일원임을 보여주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확립된 통제 가능한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신뢰는 한 존재가 ‘세상 속에 살면서 안전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 신뢰를 배신하는 사건을 겪으면 좌절감·분노·공격성·무력감 등의 복합적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이를 ‘울분’이라고 합니다. ‘울분’은 독일의 정신의학자 미하엘 린덴(Michael Linden) 베를린 샤리테대 교수에 의해 소개된 개념으로, 부당하고 모욕적인 사건에 의해 유발되며 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불만·분노·무기력감을 겪고 기본적 가치관의 손상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울분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해당 사건이 생각날 때마다 화가 나고 그 떠오름은 침습적이고 고통스럽습니다. 불쾌감·공격성·우울감이 지배적인 정서가 되고 의욕이 저하됩니다. 사건 발생을 피할 수 없었던 자신을 비난하고 무력감을 느끼며 수면 장애나 식욕 부진, 통증 등의 신체 증상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는 보내준 사연의 어려움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영주 님, 이미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과 이에 따른 분노의 여파를 당장 완전히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직무 이해도가 높고 몰입한 직원이었기에 억울함은 더 클 것이고 저는 이 분노가 충분히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에 더해 이 울화와 분노는 강한 사회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고 적극적이며 변화를 유발하는 감정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분노를 충분히 인정해 주고 또 경험하면서 우리가 이 분노의 에너지를 통해 바꿔 갈 것은 콜센터의 직무 규칙(언어 폭력과 성희롱 등을 구사하는 고객에 대한 대처 프로토콜과 응대 스크립트 등)과 회사의 구성원 보호 정책이 아닐까요. 영주 님이 바로 보셨습니다. 언어 폭력과 감정적 공격을 행하는 고객에 대한 회사 차원의 더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고 먼저 내부 구성원을 보호하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번 칼럼에서 조직 리더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큰 스트레스 사건이 발생한 당일이 골든 타임입니다. 꼭 조직원 보호에 개입해 주십시오. 이 사안은 본질적으로 서이초 교사를 보호하지 않은 조직(학교와 교육 당국)과도 겹칩니다. 잠깐이라도 휴식을 갖게 하고 상사와 동료들이 지지와 위로를 해 주며 병가·연차·상담 제공 등의 조치를 최대한 빨리 제공하는 것이 울분의 지속 시간을 줄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는 조직원의 번아웃을 예방하고 이직률도 낮춥니다. 더욱이 영주 님처럼 자기 동기가 높은 직원을 보호하고 심리적 안전을 제공하는 일은 회사 발전과 서비스 품질 증진에도 필수적입니다.

영주 님, 지금 경험하는 울분과 보람 있게 행하던 직업에서 느끼는 회의감 그리고 본인이 바라는 대처를 직속 상사나 회사의 인사 부서에 꼭 요청하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영주 님이 꽤 좋아하는 이 일과 이 일을 하는 자신을 보호하는 요청을 해 보는 것입니다. 회사 측에 ‘제게 며칠의 휴식과 상사의 따뜻하고 포용적인 말, 책임 묻기는 나중으로 그리고 상담원의 전화 끊을 권한을 더 자세하고 첨예하게 주는 제도를 마련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좋아하는 상담원 일을 하면서 더욱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전하면 좋겠습니다. 바로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일과 존엄을 지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 시도입니다. 돌에 떨어지는 낙숫물 같은 의미입니다. 또한 어떤 돌에는 ‘귀’가 달려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동시에 심리 상담과 정신건강의학과 내원 또한 고려해 보면 좋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울분은 그냥 방치해 두면 우울증으로 심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동료·친구들 외의 전문적인 도움과 지지를 받는 일은 영주 님처럼 자기 결정력이 높은 분들께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와 함께 자신의 존엄이 어떤 단어, 얼만큼 큰 목소리에서, 어떻게 침해당했는지 자세히 찾고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킬 맞춤형의 방법을 터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회복 이상으로 향후 삶에서 중요한 등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영주 님, 무엇보다도 제게 편지를 보내줘 감사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낸 영주 님의 현실과 타이밍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꼭 자신에게 수고했다, 잘했다고 말씀해 주세요. 거울을 보고 직접 자기 목소리로 말해 주세요. 저도 말씀드립니다. 영주님, 진심으로 잘해 오셨고 잘해 나갈 겁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