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페이팔 본사./연합뉴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페이팔 본사./연합뉴스
결제 공룡 페이팔이 스테이블 코인 ‘페이팔 USD(PYUSD)’를 출시했다. PYUSD는 규제를 준수하는 신탁 회사 팍소스를 통해 발행된 스테이블 코인이다. PYUSD는 달러·미국채와 현금성 자산으로 구성돼 있고 1달러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팍소스는 오는 9월부터 매달 PYUSD 준비금에 관한 보고서를 투명하게 공개할 예정이다. 페이팔 유저는 PYUSD를 페이팔과 외부 지갑에 전송할 수 있고 페이팔이 지원하는 비트코인·이더 등의 가상자산과 환전할 수 있다.

또한 페이팔의 결제·송금 애플리케이션(앱) 벤모에서도 PYUSD를 지원할 예정이다. 8월 17일 기준 약 360억원 규모의 PYUSD가 이더리움 메인넷에서 발행됐다. PYUSD의 메인넷으로 이더리움을 택하게 된 것은 풍부한 개발자 커뮤니티와 범용성이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이팔이 스테이블 코인 사업에 진출한 것은 그 무엇보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테더·서클과 같은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는 대가로 예치금의 이자를 수취한다.

미국 단기채 금리가 5%를 웃도는 현재 환경에서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것이 증명됐다. 실제로 스테이블 코인 시가 총액 기준 1위 USDT의 발행사 테더는 지난 2분기 1조원이 넘는 이익을 남겼다. 당장 테더만큼의 수입은 어렵겠지만 만약 PYUSD 발행 규모가 커지고 고금리가 유지된다면 페이팔은 부수적인 수입원을 얻을 수 있다.

한편 현재 페이팔의 결제는 법정 화폐가 사용되고 정산하는 데 수일이 소요된다. 또한 비자나 마스터 같은 중개 기관을 통해 결제하면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 만약 중개 기관 없이 스테이블 코인으로 정산하게 되면 결제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167조원 스테이블 코인 시장 경쟁 격화
페이팔은 PYUSD를 출시하며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페이팔 홈페이지
페이팔은 PYUSD를 출시하며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페이팔 홈페이지
페이팔의 가장 직접적인 경쟁사는 법정 화폐 담보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인 테더와 서클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167조원의 스테이블 코인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USDT와 USDC의 시가 총액 점유율은 각각 67%, 21%다.

USDT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스테이블 코인이지만 신뢰도와 미국의 규제가 약점으로 지적돼 왔다. USDC는 코인베이스와 서클이 발행하고 미국 규제를 준수하는 일명 ‘제도권 스테이블 코인’이지만 글로벌 1위 거래소 바이낸스에서 상장 폐지되면서 유동성이 제한되고 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하면서 디페깅이 되는 등 수모를 겪었다.

PYUSD의 시가 총액이 현재 전체 스테이블 코인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0.02%로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신뢰도 높였지만 ‘탈중앙성’ 의문 그런데 PYUSD가 현재 스테이블 코인 시장을 뒤흔들 만한 잠재력이 있는 메기로 주목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신뢰도다. 현존하는 스테이블 코인 시장은 ‘스테이블’하지 않다. USDT는 테더사의 불투명한 지배 구조와 준비금에 대한 신뢰도 이슈로 디페깅이 빈번하게 발생해 왔다.

또한 USDC도 서클의 준비금을 보관하고 있던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설이 불거지면서 디페깅이 발생한 바 있다. 돈의 핵심은 ‘신뢰’인데 달러와 가치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스테이블 코인의 디페깅 전력은 신뢰에 큰 흠집을 낸 사례다. USDT·USDC와 달리 PYUSD는 거대한 자본력이 있는 페이팔과 규제를 준수하는 팍소스가 발행했기 때문에 신뢰도 측면에서 더욱 안심이 된다.

또 PYUSD의 사용처는 USDT나 USDC와 크게 다르다. 현재 USDT와 USDC의 주된 사용처는 가상자산 생태계 내에서 트레이딩이나 디파이 목적으로 쓰이는 것에 한정돼 있다. 반면 PYUSD는 실생활에서 페이팔 생태계뿐만 아니라 이베이 같은 전자 상거래·온라인 게임 등에 활용될 잠재력이 있다. 3억 명이 넘는 유저를 가진 페이팔의 스테이블 코인 시장 진출을 진정한 ‘매스 어덥션(mass adoption)’을 실현할 수 있게 만드는 매개체로 보는 이유다.

사실 이러한 PYUSD의 비전은 USDT보다 USDC와 더 가깝다. 따라서 PYUSD의 등장과 스테이블 코인 시장 경쟁 심화에 따른 영향은 USDT보다 USDC 진영이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언젠가 미국의 은행권이나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USDC의 발행사 서클의 인수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골드만삭스·JP모간·뱅크오브아메리카·씨티 같은 대형 은행이나 비자·마스터카드가 서클을 인수하게 되면 곧바로 수십조원에 해당하는 USDC 네트워크를 확보하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페이팔의 PYUSD에 대해 장밋빛 전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PYUSD의 코드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다. PYUSD는 코드에 사용자의 자산을 동결하고 압수하는 기능을 넣었는데 이는 검열 기능으로 작용한다. 블록체인의 검열 저항성·탈중앙성을 지지하는 이들은 PYUSD를 가리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CBDC와 다를 바 없다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양상이다.


시가 총액 기준 전체 스테이블 코인 시장에서 0.02%에 불과한 PYUSD가 메기가 될 수 있을까.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만 미래의 디지털 화폐 시장 구도가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자산, 민간 기업이 발행하는 스테이블 코인,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CBDC로 구성될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때 스테이블 코인은 결제·지급 수단으로 기능하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페이팔 스테이블 코인 시장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PYUSD가 프라이빗 블록체인이 아니라 이더리움과 같은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ERC-20토큰으로 발행됐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JP모간이 JPM코인을 프라이빗 블록체인에서 취급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양상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프라이빗 블록체인에 매우 회의적이다. 비트코인은 금과 같은 하드 머니로, 이더리움은 스테이블 코인이 발행되는 머니레이어로 기능하는 퍼블릭 블록체인의 시대가 개화되고 있다고 믿는다.


한중섭 ‘어바웃 머니’, ‘비트코인 제국주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