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은 그들만의 헤리티지로 소비자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 오고 있다. 20세기 중반 기성복 패션이 활성화되면서 ‘오트 쿠튀르(상류층인 귀족이나 왕족을 위한 고급 옷을 만드는 의상실)’ 중심의 기존 패션 하우스들의 활동이 주춤해지고 디자이너들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창업자가 아닌 디자이너가 패션 하우스를 책임지게 되면서 외부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시도가 이뤄진 것이다.
패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브랜드와 디자이너 수도 증가하고 다양화되고 있다. 수많은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은 선의의 경쟁을 하며 현대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그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고 만족감을 높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핵심 고민을 하는 주체로서 패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량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칼 라거펠트, 가장 성공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민감한 소비자의 감성이 패션 시장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오래된 전통성을 가지고 명성을 유지해 오던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들은 그들만의 헤리티지를 발전시켜 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찾게 됐다. 이러한 패션 시장의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라거펠트가 있었다. 그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성공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한 명이었다.
이탈리아 장인 정신은 펜디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힘이다. 펜디는 1994년 펜디의 장인 정신을 상징하는 셀러리아백(사진①)을 부활시켰다. 마구를 제작하는 장인이 이탈리아 최고의 제혁소에서 만든 가죽을 선택하고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해 만들어졌다. 고대 로마 전통 기법인 기름을 먹인 실을 이용해 굵은 스티치로 표현하는 기법을 셀러리아백에 적용하고 안감은 가죽이나 스웨이드를 사용하고 버클과 내부 실버 플레이트에는 제품 고유의 시리얼 넘버를 새겼다.
이 모든 공정은 장인의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고 그 결과 이 백은 매우 유연하면서도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셀러리아백들은 메이드 투 오더(개인 주문)를 통해서도 주문할 수 있었다. 메이드 투 오더 서비스는 15가지 컬러의 송아지 가죽과 세 가지 컬러의 악어 가죽 중 하나의 소재를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다음 디자인을 정하는데 기존 셀러리아 라인에 있는 열 가지 모델이나 혹은 네 가지 다른 모양의 모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원하는 이니셜을 정하면 된다.
가방뿐만 아니라 카시트·헬멧·골프 장갑 등 원하는 제품을 제작할 수도 있다. 2009년 5월 빈티지 자동차 경주 대회인 밀레밀리아에 펜디 셀러리아로 브랜딩한 1951년산 빈티지 재규어 XR120이 출전했다. 호화롭게 단장한 노신사 같았던 재규어는 이탈리아 브래시아에서 출발해 로마까지 거뜬히 왕복 주행했다. 펜디는 셀러리아 라인으로 자전거도 만들며 럭셔리 브랜드의 장점을 보여 줬다. 이탈리아에서 핸드메이드 자전거로 유명한 아비치와 공동으로 자전거를 만들었다(사진②).
슈퍼카 마세라티, 펜디 이름으로 선보여 철재 크롬 소재 브레이크, 수공으로 마무리한 가죽 안장, 신문 거치대 등 전형적인 이탈리아 스타일의 자전거에 위성항법장치(GPS) 내비게이터 홀더, 가젤 털로 만든 사이드 백, 셀러리아 로고를 새긴 로만 가죽의 미니 트렁크 등을 더한 자전거는 명품이란 무엇인지 잘 보여 줬다. 2011년 9월 프앙크프르트 오토쇼에서는 모든 남성들의 로망인 이탈리아 슈퍼카 마세라티 그란카브리오가 펜디의 이름으로 선보이기도 했다(사진③).
이는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창업자의 손녀인 실비아 벤추리니가 직접 디자인했다. 다크 그레이의 컬러 도장을 3중으로 하고 셀러리아 핸드백에 사용한 최상급 소가죽으로 내부 시트를 만들었고 19인치의 바퀴 중앙에는 펜디의 더블 F 로고를 넣었다. 펜디는 이 마세라티 그란카브리오 펜디를 타고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곳곳의 유서 깊은 공방을 찾아냈다. 이는 ‘더 위스퍼드(The Whispered)’라는 이름의 프로젝트하에 책과 다큐멘터리로 제작됐고 이탈리아 시골 여행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매우 볼만한 작품이다. 이탈리아 장인 정신에 대한 펜디의 자부심은 2011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핸드메이드 프로젝트 ‘파토 아 마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는 펜디가 셀러리아 라인의 제품을 만들고 남은 재료를 재활용해 아티스트에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는 프로젝트다.
2007년 10월 펜디는 중국 만리장성에서 패션쇼를 진행했다(사진④).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새로운 패션쇼였다. 패션쇼를 진행하기 위해 전기를 산 위로 끌어와야 했고 옷을 나르는 지극히 평범한 일조차 전략이 필요했다. 만리장성에서의 패션쇼는 어느 하나 녹녹하지 않았다. 하지만 펜디는 도전을 즐겼다. 패션쇼가 끝난 후 있을 파티에서 쓸 그릇 하나까지도 직접 중국 현지에 있는 가마에서 주문했다. 차라리 이탈리아에서 도자기를 공수해 오는 것이 편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펜디는 현지의 그릇을 쓰는 것이 이 패션쇼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중국인들이 행운의 숫자라고 여기는 8을 이용해 총 88m의 무대 길이에 88명의 모델을 무대에 세웠다. 밍글링(패션쇼가 시작되기 전에 샴페인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는 것)을 하는 것부터 패션쇼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어느하나 소홀함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TV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이례적이었다. 로마에서 시작한 펜디는 2000년 명품 제국을 만들어 가고 있는 베르나르 아르노에 의해 LVMH 그룹의 일원이 됐다.
참고 도서 : ‘칼 라거펠트 디렉팅의 샤넬과 펜디에 대한 디자인 특성 연구(배우리·김윤경·이경희, 한국의류산업학회지 제23권 제6호)’,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명수진, 삼양미디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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