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재산권 산책]
다시 주목받는 ‘잊힐 권리’[김윤희의 지식재산권 산책]
다시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주목받고 있다. 한국에 잊힐 권리에 대한 법적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 등 온라인에 존재하는 자신과 관련된 각종 정보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잊힐 권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2014년 유럽연합(EU) 최고 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European Court of Justice)가 내린 판결이다.

스페인의 변호사인 마리오 코스테자 곤잘레스는 2010년 스페인 신문의 1998년 기사가 링크돼 있는 검색 결과를 보여준 구글에 위 기사를 검색 결과에서 제거하거나 차단하는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구글은 이를 거부했고 소송을 거친 결과 유럽사법재판소는 곤잘레스 변호사의 손을 들어줬다.

곤잘레스 변호사가 위 기사의 삭제를 요청한 이유는 구글에서 곤잘레스 변호사의 이름을 검색하면 곤잘레스 소유 부동산의 공매에 관한 법원의 판결 내용이 기재된 위 1998년 신문 기사가 검색됐는데 위 기사에는 곤잘레스 변호사의 부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곤잘레스 변호사는 자신의 부채가 이미 청산됐고 10년도 더 지났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적절한 정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반면 구글은 제삼자가 인터넷에 올린 정보를 찾아내 인터넷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검색 엔진의 행위는 정보를 선별하는 행위가 개입되지 않으므로 개인 정보의 처리(processing)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럽사법재판소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검색 엔진 운영자는 처리자(controller)라고 판단하며 구글에 해당 정보의 삭제를 명했다.

또 잊힐 권리가 무한정 인정되는 권리가 아니라 문제의 정보가 데이터 처리 목적에 비해 부정확(inaccurate), 부적절(inadequate), 관련이 없거나(irrelevant) 혹은 과도(excessive)한 때에 적용되는 것이고 사안에 따라 표현의 자유나 다른 기본권, 공인으로서의 역할 등과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에는 아직 잊힐 권리를 인정한 판례는 없다. 하지만 이웃 나라인 일본에는 벌써 2건의 최고재판소 판결이 나와 있다. 3년 전 아동 성매매로 체포된 A 씨는 구글에서 자신을 검색하면 과거 체포 이력이 표시돼 ‘갱생을 방해 받지 않을 이익’이 위법하게 침해됐다고 주장하며 인격권에 근거한 방해 배제 또는 방해 예방 청구로서 검색 결과 삭제를 구하는 가처분을 신청했다.

A씨의 체포는 체포 당일에 보도됐다. 1심은 잊힐 권리를 직접 언급하며 A 씨의 신청을 인용했지만 2심은 결과를 달리해 A 씨의 신청을 기각했고 3심인 최고재판소 역시 A 씨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고재판소는 잊힐 권리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고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을 비교 형량해 검색 결과 삭제를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2022년의 최고재판소 판결은 ‘트위터(현재 엑스)’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원고인 B 씨는 여관의 여성용 욕탕의 탈의실에 침입했다는 피의 사실로 체포돼 건조물 침입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B 씨의 체포 사실은 체포 당일 보도돼 인터넷에 게재됐고 같은 날 누군가가 관련 기사를 자신의 엑스 계정에 링크했다.

1심과 2심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는데 프라이버시를 위법하게 침해해 삭제를 구할 수 있는 경우는 여러 사정을 감안할 때 당해 사실이 공표되지 않을 법적 이익이 계속적으로 공표돼야 하는 이유보다 우월한 경우여야 하는데 본건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고재판소는 결론을 달리해 삭제를 명했다. B 씨의 체포 사실이 8년이나 경과해 형 선고의 효력이 상실됐다는 점, 문제의 보도 기사 자체가 인터넷에서 삭제돼 있다는 점, 엑스의 정보가 방대하기는 하지만 B 씨와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다는 점, B 씨는 공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최근 한국에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잊힐 권리 보장을 추진하고 만 24세 미만 국민의 ‘잊힐 권리 서비스’를 시범 사업으로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잊힐 권리의 개념과 인정되는 경우에 대해 재정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윤희 법무법인(유) 세종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