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워싱턴이 하루아침에 한국 경제의 명줄을 쥔 도시가 됐다. 엔데믹(주기적 유행) 이후 세계화의 후퇴, 미국의 제조업 회복 전략,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맞물린 결과다. 미국은 지난 3년 간 자국우선주의를 강화하며 공급망을 재편했다. 해외 기업의 생산공장을 미국 내로 끌어들였고 미국 내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제를 활성화했다. 2022년 한국은 미국에 3만 5000여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해외 기업 중 미국에 가장 많은 투자금을 쏟아 부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제조업 르네상스'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 제조업 부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 5가지를 뽑았다. #장면 1. 바이든의 첫 행선지, 삼성전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첫 방한 행선지로 삼성전자 평택 공장을 찾았다./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첫 방한 행선지로 삼성전자 평택 공장을 찾았다./연합뉴스
두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방한 일정으로 경기도 평택을 찾았다. 목적지는 달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평택 험프리스 미군 기지를 방문했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2년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로 향했다. 반도체 공급망을 전략 자원화하 는 ‘경제 안보’ 기조가 깔린 행보였다.

미국 대통령의 움직임 가운데 의미 없는 것은 없다. 하나하나에는 복선이 숨어 있다. 반도체 공급망을 전략 자원화하는 ‘경제 안보’ 기조가 깔린 행보였다. 첨단 시설을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 그를 안내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노회한 정치인 바이든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훌륭한 기업이 미국에 이익이 되게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한국이 직면할 대응 과제를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공장을 함께 둘러본 뒤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격상했다. 협력 분야는 군사 안보에서 경제·보건·기후 등 전 영역으로 확대했다. #장면 2.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올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CEO들과의 화상 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집어들었다./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CEO들과의 화상 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집어들었다./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하기 1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2021년 4월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반도체 대응 최고경영자(CEO) 화상 정상 회의’를 개최했다. 취임 3개월 만이었다.

이 회의에 삼성전자와 TSMC를 비롯해 인텔·마이크론·NXP 등 반도체 생산 업체와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 자동차 업체인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 등 19개 기업이 참여했다. 반도체 공급자와 수요자를 모두 부른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웨이퍼를 집어 들었다. “이것은 ‘인프라 인스트럭처(기반 시설)’다. 우리는 지난 것을 수리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새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웨이퍼를 집어 든 이유였다. 반도체를 미국의 기반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중국과의 전쟁을 공식화했다. 그는 23명의 상원의원과 42명의 하원의원들에게서 반도체 투자를 초당적으로 지지하는 서한을 받았다고 소개하며 “서한에는 ‘중국 공산당은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고 지배하려는 공격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삼성전자)과 대만(TSMC) 기업이 참여한 자리에서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생산 주도권을 가져오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글로벌 반도체 생산은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가 70%를 차지하고 있다. 생산 점유율만 낮을 뿐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장비 등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2020년 기준 전 세계 15대 반도체 업체 중 8개가 미국 회사였다.

하지만 대부분 반도체 설계 기업이었고 ‘제조’에서 뒤처졌다. 미 정부가 설계부터 생산까지 반도체 공급망 전반에 걸친 ‘자립’을 결정한 이유다. 그 결과 삼성전자와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미국에 수십조원을 들여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미국산 점유율이 상승한다는 의미는 다른 국가나 기업에서 만든 반도체의 비중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공급망 재편은 빠르게 이뤄졌다. 2022년 8월 반도체 산업 육성을 담은 반도체 및 과학법(칩스법)이 시행됐다. 칩스법 시행 후 1년 간 바이든 대통령의 ‘반도체 자립’ 목표는 궤도에 올랐다. 미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칩스법 시행 후 1년간 전 세계 기업들에서 460여 개의 투자 의향서가 접수됐고 공식화된 투자 계획 규모만 1660억 달러(약 220조3000억원)에 달한다.#장면3. “미국의 블루 칼라 청사진” 바이든 대통령의 환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4일 펜실베니아 노조를 만나 '중산층의 재건' 목표를 확인 시켰다./AF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4일 펜실베니아 노조를 만나 '중산층의 재건' 목표를 확인 시켰다./AFP 연합뉴스
공급망 재편의 목표는 미국 제조업의 부활이다. 제조업 부활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미국 중산층 재건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제조업 르네상스’를 위해 칩스법과 함께 통과시킨 법안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가를 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법이다. 지난해 발생한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 공급망 대란이므로, IRA로 전기차 등 청정 에너지 산업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해 고물가를 극복하겠다는 게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의 구상이었다. 칩스법과 마찬가지로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위한 법안인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8월 백악관에서 열린 IRA 시행 1주년 연설 자리에서 주먹을 쥐며 환호했다. “이 법은 미국의 일자리와 경제 성장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런 경제 성과가 노동자 계층을 위한 청사진이라고 누차 강조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며칠 뒤 필라델피아 노조와 만나 “재임 2년 동안 3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며 “중산층이 잘되면 모두가 잘된다. 바이드노믹스는 당신을 위한, 미국의 블루 칼라의 청사진”이라고 말했다.

미국 블루 칼라 노동자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이다. 트럼프와 힐러리가 겨루던 45대 미국 대선 때부터 백인 중산층이 선거의 키를 쥐고 있다. 김동석 한국유권자협회 대표는 “2008년 금융 위기 이전까지 미국의 기틀이었던 금융 산업이 부흥하고 망하고 부활하는 과정에서 제조업 노동자들은 소외됐다”며 “트럼프 전 대통령은 ‘러스트 벨트(구 공업 지역)’에 자리 잡은 백인 중산층의 소외와 분노를 자극해 당선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전 역시 백인 중산층의 마음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년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모두 러스트 벨트에서 열리는 이유다. #장면 4. 바이든 ‘부통령’의 ‘피벗 투 아시아’
2008년 당시 대통령 후보자였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러닝메이트였던 조 바이든과 연설하고 있다./AP 연합뉴스
2008년 당시 대통령 후보자였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러닝메이트였던 조 바이든과 연설하고 있다./AP 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의 ‘중국 견제’와 ‘제조업 르네상스’는 오랜 꿈이었다. 그가 오바마 행정부 부통령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든 ‘부통령’은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안보를 설계했다. 당시 외교 정책의 전환점은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 : 아시아 중시 정책)’였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강력한 동맹을 맺는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아시아로의 전략 축 이동은 쉽지 않았다. 유럽과 중동에서 잇따라 난제가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비롯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새로운 테러 집단이 부상하는 등 아시아 정책에는 예상 만큼 많은 힘이 실리지 못했다. 결국 미국의 피벗 투 아시아 정책은 유야무야됐고 미국은 트럼프 시대를 맞았다.

바이든이 2021년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피벗 투 아시아’는 다시 가동된다. 바이든 대통령이 외교 안보 분야에 임명한 이들 대부분이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피벗 투 아시아의 핵심 멤버였다.

김동석 대표는 “당시 정책을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CS) 인도태평양조정관, 웬디 셔먼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 등이 지금 바이든 정부에 함께하고 있다”며 “10여 년 전부터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치기를 원했지만 냉랭한 한·일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한·일 관계가 개선되면서 캠프데이비드 정상 회담이 극적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장면 5. 2012년 브루킹스연구소의 “제조업 르네상스”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8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메릴랜드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대통령실 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8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메릴랜드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대통령실 기자단
“10여 년간 600만 개가 넘는 일자리가 사라졌다. 무역 적자는 4조5000억 달러에 육박했다. 세계 시장에서 ‘메이드 인 USA’는 자취를 감췄다.”

2012년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가 낸 보고서 내용이다. 중국에 뺏긴 일자리를 되찾고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 미국 행정부와 맥을 같이한다. 당시 보고서는 환율 조작과 인위적 임금 억제로 제조업 유치에 나서고 있는 중국에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기업들이 중국보다 미국을 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 재임 시절 나온 ‘제조업 르네상스’ 보고서와 바이든 대통령의 오랜 꿈이었던 ‘피벗 투 아시아’ 전략이 10년이 지난 지금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결정은 워싱턴D.C.에서 이뤄지고 있다.

[왜 워싱턴인가 : K스트리트 달려가는 기업들]
①삼성·SK·현대차, 워싱턴 전초기지 강화하고 거물급 인사 영입
②도한의 포스코아메리카 법인장 "미국의 사소한 법안 한 줄이 기업 통째로 흔들 수 있어"
③'바이든의 10년 꿈'…해외 기업 빨아들여 이룬 제조업 르네상스
④유혜영 프린스턴대 교수 "큰 그림에 집착하는 문화가 한국 로비를 망친다"
⑤하와이, LA, 뉴욕...아메리칸 드림의 주요 도시
⑥"G2 편승 없이 개방형 통상 국가로 초일류 강대국 발돋움 해야"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