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이크론, 내년 상반기까지 'HBM3E' 양산 계획
SK하이닉스·삼성전자와 경쟁…엔비디아 고객으로 확보
후발주자 마이크론 "HBM, 내년부터 매출 기여할 것"

마이크론. (사진=마이크론 홈페이지)
마이크론. (사진=마이크론 홈페이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초거대 AI ‘챗GPT’ 등장 이후 급부상한 HBM(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을 놓고 경쟁이 뜨거워졌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주도해온 HBM 시장에 미국 최대 메모리 업체인 마이크론까지 뛰어들었다.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이 HBM 시장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마이크론까지 참전한 ‘차세대 HBM’글로벌 3위 메모리 제조사인 미국 마이크론이 HBM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최근 2023 회계연도 4분기(6~8월) 실적 발표 후 열린 콘퍼런스콜에서 연내 5세대 제품인 ‘HBM3E’의 양산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해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부가가치, 고성능 제품이다. 주로 인공지능(AI) 제품에 사용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들어가며, 평균적으로 한 개의 AI 제품에 8~12개의 HBM이 탑재된다.

HBM은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된 상태다. 2013년 SK하이닉스가 AMD와 함께 출시한 게 최초다.

5세대인 HBM3E는 HBM3의 ‘확장(Extended) 버전’이다. 이론적으로 HBM3E는 초당 최대 1.15TB(테라바이트) 이상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FHD(Full-HD)급 영화 230편을 약 1초 만에 처리하는 수준이다.

HBM3E는 현재 메모리 제조사 어느 곳도 양산을 시작하지 않은 제품이다. 현재 시중에서 사용하는 최신 제품은 4세대 제품인 ‘HBM3’다. HBM3 시장점유율 95%(공급량 기준)에 달하는 SK하이닉스조차 지난 8월 고객사에 ‘HBM3E’ 샘플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는 내년 상반기부터 HBM3E 양산에 들어가 AI 메모리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겠다는 계획이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제품은 현재 고객과 함께 검증 단계에 있으며 2024년 초부터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내년에 의미 있는 매출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늦어도 포기 못 하는 이유 ‘가격·성장성’마이크론은 “고성능 컴퓨팅에 사용되는 HBM은 생성형 AI에 대한 수요에 힘입어 올해 수요가 매우 높았다”며 “고객과 긴밀히 협력해 업계 최고 수준의 HBM3E 제품을 샘플링하기 시작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마이크론은 HBM 시장의 후발주자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HBM 시장점유율(2022년 기준)은 SK하이닉스 50%, 삼성전자 40%, 마이크론 10%다. D램 시장에서 25%의 점유율을 유지하며 2위 SK하이닉스(31.9%)를 바짝 뒤쫓는 모습과는 좀 다르다. 점유율이 더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올해 HBM의 시장점유율은 SK하이닉스 52%, 삼성전자 43%, 마이크론 5%로 예상된다.

엇갈린 선택의 결과다. SK하이닉스가 HBM 기술에 집중한 2010년대 초반 마이크론은 HBM과 비슷하게 D램을 적층하는 HMC(Hybrid Memory Cube, 하이브리드 메모리 큐브) 기술 개발에 나섰다.
HBM3E. (사진=SK하이닉스)
HBM3E. (사진=SK하이닉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SK하이닉스는 기술 개발에 이어 양산에 성공했지만 마이크론은 기술 구현에 어려움을 겪으며 HMC의 상용화에 실패했다. 결국 HBM이 D램 적층 방식의 업계 표준이 됐고, 마이크론은 경쟁사 대비 7~8년 뒤처진 2018년에서야 HBM 투자를 시작했다. 뒤늦게 HBM 시장에 뛰어들어 내년 중으로 4세대 제품인 HBM3 제품을 양산한다고 밝혔지만 SK하이닉스가 최근 5세대 제품 개발에 성공하자 전략을 변경했다. HBM3를 건너뛰고 HBM3E 제품 양산으로 넘어가겠다는 전략이다.

마이크론의 HBM 기술은 3세대인 HBM2E 수준이다. 지난해 10월 마이크론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등록한 연례 보고서에서 “HBM2E 양산을 시작했다”고 명시했다.

마이크론이 연례 보고서에 HBM 기술에 대한 내용을 기재한 것은 2018년 투자 확정 이후 처음이다. 2019년부터 제품 포트폴리오에는 ‘High Bandwidth Memory(HBM)’라는 단어를 추가했지만 기술에 대한 별도 설명은 없었다. HBM2E 양산은 경쟁사보다 2년 이상 느린 시점이며, 이마저도 업계에서는 수율(합격품의 비율) 등 품질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결국 마이크론의 HBM 전략은 1~4세대를 건너뛰고 곧바로 5세대에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이크론이 HBM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가격과 시장 성장성 때문이다. HBM의 수요는 D램의 1~2%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D램보다 최대 7배 이상 비싸다. HBM 하나를 파는 게 D램 7개를 판매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게다가 시장 전망도 긍정적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AI 경쟁이 심화하면서 HBM 수요가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AI 서버 출하량은 전년 대비 15.4%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글, 아마존웹서비스(AWS), 메타(옛 페이스북), 바이트댄스 등이 생성형 AI 제품 또는 서비스를 출시하는 영향이다. 올해부터 2027년까지 AI 서버 출하량은 연평균 12.2% 증가할 것으로 관측된다. HBM 시장 규모는 지난해 23억 달러(약 3조원)에서 2025년 103억 달러(약 13조9000억원)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마이크론, 미국 빅테크 기업들 확보할까빅테크 기업들이 AI 개발을 위해 고급 사양의 반도체를 요구하면서 반도체 업계는 기존 HBM을 개선한 차세대 제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심지어 경쟁사들은 5세대 양산과 동시에 6세대를 준비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2024년 5세대 HBM 제품인 HBM3E를 양산하고, 2026년에 6세대 제품인 HBM4 양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2025년을 목표로 HBM4 기술을 개발 중이다.

경쟁사의 상황은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10월 11일 매출 67조원, 영업이익 2조4000억원의 3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했다. 반도체 부문은 여전히 3조7000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지만 개선 속도가 빠르다. 증권업계에서는 HBM 비중이 전분기 대비 늘어난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김광진·최영주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HBM은 긍정적”이라며 “고객사 승인과 양산 일정을 고려할 때 HBM3는 2024년 1분기, HBM3E는 2024년 1분기부터 매출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역시 3분기에 1조4000억~1조5000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크지만 전분기 대비 적자 규모를 축소할 것으로 보인다. HBM과 AI서버용 고용량 DRAM 모듈 등 고부가가치 제품 판매가 늘어난 영향이다.

이 같은 상황에 이전 단계를 건너뛴 마이크론이 계획대로 내년 상반기에 양산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심지어 마이크론이 목표하는 양산 시기는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경쟁사보다 빠르다.

다만 수율을 끌어올린다면 미국 빅테크 기업을 고객사로 확보할 가능성도 크다. 특히 AI칩의 선두주자인 엔비디아가 내년에 마이크론의 HBM3E를 사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최근 선보인 AI 반도체 ‘H100’과 내년 양산할 ‘GH200’ 제품에 HBM3E를 탑재할 예정이다.

IT전문매체 아난테크는 “엔비디아가 마이크론의 새로운 램(RAM)의 주요 고객 중 하나”라며 “심지어 엔비디아가 마이크론의 HBM3E를 사용하는 유일한 고객도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매체는 “경쟁사보다 앞서 프리미엄 제품을 선보이는 것은 HBM 시장의 약자인 마이크론에 큰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