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5회>
아마데오 디캔터
아마데오 디캔터
와인을 맛있고 지혜롭게 마시는 방법 두 번째는 ‘숙성기간’이다. 온도와 함께 ‘시간’에 그 답이 있다. 와인이 일반 주류와 다른 점이다. 인내심이 부족하다면 쓰고 떫은맛과 밋밋한 향을 각오해야 한다.

따져보면 와인 생산과정은 인생주기와 비슷하다. 포도 수확과 발효 그리고 숙성을 마친 와인은 마침내 병에 담긴다. 초반 거친 반항기(보틀 쇼크 등)를 거치다가 서서히 정점에 도달한다.
인생 황금기처럼 와인도 맛의 정점에서는 한껏 뽐내고 우쭐거린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변하고 퇴화과정을 밟는다. 그래서 ‘와인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들 한다.

와인은 병입 후 1~2년 내 마셔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장기 숙성용은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오랜 기다림과 유혹을 이겨내야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아무리 비싼 고급 와인을 내놔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타닌이 거칠고 향이 닫혀 있다’고 항의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와인 병 라벨에 시음 적기는 물론이고 유효, 유통기한도 표기돼 있지 않다. 소비자가 스타일이나 직접 시음 또는 빈티지 차트를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보르도나 미국 나파 지역 고급 와인의 경우 적정 숙성기간은 보통 10년 이상이다. 포도 생산연도(빈티지)에 따라 기간이 더 연장되기도 한다. ‘빈티지 포트’ 와인은 최소 20년 이상 보관 후 마실 것을 권장한다.

이 세상 모든 와인의 시음 적기를 어찌 다 맞출 수 있으랴. 성격 급한 한국 사람에게는 무리한 주문이다. 다만 불가피하게 일찍 마시는 경우, 디캔팅을 통해 공기와 접촉시간을 늘려주면 어느 정도 보완된다.

디캔팅이란 병에 담긴 와인을 별도 용기인 디캔터에 가늘게, 그리고 서서히 따르는 과정을 말한다. 와인은 산소와 접촉하면서 맛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여러 종류의 향이 한꺼번에 열리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래 디캔터는 초창기 침전물을 제거할 목적으로 개발됐다. 일종의 거름망 역할을 한 셈이다. 장기 숙성된 고급 와인은 오랜 보관 동안 색소와 타닌, 주석산염 등 침전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코르크 마개 부식으로 디캔터 사용이 불가피할 때가 많다. 그러던 것이 와인 양조와 포장 기술이 발전하면서 침전물이 줄어들자 디캔터의 용도가 달라졌다.

주로 타닌 성분 강한 미숙성 와인이 그 대상이다. 첫잔과 둘째 잔, 셋째 잔의 느낌이 다른 것도 같은 이치로 보면 정확하다. 잔에 들어 있는 와인을 돌려 표면을 넓혀주는 ‘스웰링’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

디캔팅 시간은 와인 종류에 따라 다양하다. 오래된 빈티지 와인의 경우 시간이 짧을수록 좋다. 마시기 직전 몇 분이면 충분하다. 공기와 오래 접촉하다 보면 맛과 향이 사라지는 등 자칫 맛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병입한 지 얼마 안 된 와인은 한 시간 이상 공기와 접촉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레드 와인뿐 아니라 화이트 와인 역시 디캔팅으로 더 풍부한 향을 잡을 수 있다.

한편 ‘디캔팅 무용론’을 주장하는 전문가도 많다. 테이블을 멋있게 꾸미거나 심리적 효과 외에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 병입된 와인 숙성은 미생물과 관련이 없고, 짧은 시간 공기와 접촉해도 와인 맛과 향에 별다른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술 한 병 마시는 데도 이렇게 이견이 많고 복잡하니, 와인 공부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김동식 와인 칼럼니스트, 국제와인전문가(WSET Level 3)
juju4333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