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서영의 명품이야기
제냐①
창업자 에르메네질도 제냐 
사진 출처 : Zegna.com
창업자 에르메네질도 제냐 사진 출처 : Zegna.com
좋은 재료가 요리의 맛을 결정하듯 패션도 마찬가지다. 젊어서는 디자인과 디테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면 나이 들어서는 좋은 소재를 우선시한다. 최근 패션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올드머니룩(대대로 부를 축척해온 부자들의 옷장을 열어보면 있을 법한 옷의 스타일)’ 또한 좋은 소재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남성복에 있어 올드머니룩의 대표적인 브랜드를 꼽으라면 제냐가 아닐까 한다.

창립자 에르메네질도 제냐가 18세가 되던 1910년. 이탈리아 북부 트리로베에서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프랑스식 직조공장을 영국식 기계로 바꾸고, 품질 좋은 원자재를 직수입해 최고급 원단을 만들면서 제냐의 사업은 시작됐다. 1930년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원단 가장자리에 ‘Ermenegildo Zegna’를 새겨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원단에 대한 품질보증뿐만 아니라 그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1933년 제냐는 원료 수급뿐만 아니라 방적(단섬유 등의 짧은 섬유를 조작하여 적당한 굵기의 기다란 실을 만드는 일)과 방직(원단을 직조하는 것), 염색과 마무리 공정까지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원료부터 직조까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10년에 설립된 원단 공장인 라니피시오(양모 공장이라는 의미) 제냐는 브랜드의 심장이자 세계적인 원단회사의 중심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양모에서 매장까지 이어지는 제냐의 여정 
사진 출처 ;Zegna. Com
양모에서 매장까지 이어지는 제냐의 여정 사진 출처 ;Zegna. Com
제냐의 맞춤 서비스
사진 출처 ;Zegna. Com
제냐의 맞춤 서비스 사진 출처 ;Zegna. Com
울 원료 1g에서 원사 180m 만들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원단은 제냐에 사용되는 것은 물론,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이 원단을 앞다투어 사용했다. 제냐의 원단은 더 가볍고, 더 부드럽고, 더 기능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라니피시오 제냐에서는 1g의 울 원료에서 180m의 원사를(180수), 1g의 캐시미어 원료에서 150m의 원사(150수)를 만들 수 있었다. 라니피시오 제냐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11.1미크론 두께의 혁신적인 패브릭을 선보이며, 패브릭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보통 사람의 머리카락 두께가 50~60미크론, 스코틀랜드 트위드 패브릭이 35미크론임을 감안할 때 제냐의 기술은 놀라웠다. 제냐의 장인 정신은 원단 개발뿐만 아니라 원단 품질 검사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났다. 라니피시오 제냐의 품질검사 공정은 천에 난 흠집을 찾아내기 위해 레이저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손으로 이루어졌다.

흠집을 소공(고치는 것)하는 것도 옛날 방식 그대로 장인이 바늘과 실을 사용해 수정했다. 천연섬유 중 가장 고급인 캐시미어 원단은 솜털을 세워 더욱 부드럽게 하기 위한 빗질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사용하는 도구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야생하는 산토끼꽃 열매인 티슬이었다. 이렇게 티슬을 사용해 캐시미어의 기모를 일으키는 것은 100년 전과 똑같은 방법이다.

원단에 대한 자존심은 제냐의 ‘벨루스 오레움 컬렉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냐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좋은 소재를 찾아 다녔다. 호주산 메리노 울, 내몽고산 캐시미어, 아프리카산 모헤어, 인도산 파시미나 캐시미어, 페루산 비쿠나, 중국산 실크 등 원사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양모인데, 제냐는 직접 그해 최고의 양모 생산자를 선정하고 황금 양털과 트로피를 수여했다.

최고 양모 생산자와 계약, 최고 슈트 선봬
제냐의 수트를 입은 배우 톰 크루즈 
사진 출처 : instagram  zegnaofficial
제냐의 수트를 입은 배우 톰 크루즈 사진 출처 : instagram zegnaofficial
그다음 우승자와 독점으로 계약을 맺어 최고의 재료로 만든 최고의 슈트를 선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벨루스 오레움 컬렉션이다. 벨루스 오레움 컬렉션은 한 해에 고작 50여 벌 정도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공급량이 적은 만큼 사고 싶다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냐는 매년 국가별로 한 명의 인물을 선정해 벨루스 오레움 컬렉션을 제공한다. 제냐의 벨루스 오레움 컬렉션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명성이 보증되는 셈이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지휘자인 발레리 게르기예프·정명훈이 이 영예를 누렸다.

1960년 제냐는 원단 생산 기술을 바탕으로 남성복 시장에 진출했다. 1968년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이탈리아 노베라 지역에 의류공장을 설립해 재킷과 바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1970년대 스포츠웨어와 액세서리를 출시했다. 1972년에는 기성복을 체형에 맞게 수정해 주는 ‘수미주라 라인’을 출시했다. 이는 아르마니의 MTM(고객을 위한 맞춤) 서비스와 비슷하다. 이탈리아어로 ‘당신의 사이즈에 맞춘다’라는 뜻의 수미주라는 맞춤복과 기성복의 장점을 결합한 라인이다.

고객의 사이즈에 따라 기성복으로 나와 있는 패턴을 보완하면서 제작하는 방식이다. 편의를 위해 고객의 신체 사이즈를 컴퓨터 시스템에 저장·관리하여 세계 어느 매장에서나 맞춤복 주문이 가능하도록 했다. 수미주라 라인은 450여 종의 원단과 100여 종의 모델 중 하나씩을 골라 주문하면 마스터 재단사가 만든 140개의 패턴 조각을 사용, 장인이 200번 정도에 이르는 재봉과 가공을 한다.

여러 번의 다림질과 품질 검사를 거쳐 주문자의 몸에 꼭 맞게 옷을 제작한다. 이렇게 제작된 옷의 안쪽에는 주문자의 이름과 함께 ‘한 사람을 위한 커팅’이라는 뜻의 ‘Taglio Exclussivo’라는 글자를 새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공 상태에서 다림질해 24시간 동안 습기와 온도에 대한 적응력 테스트를 한다. 이렇게 6주간의 제작과 테스트 기간을 거친 뒤에는 세계 각국의 고객들에게 배송된다.

에르메네질도 제냐가 남성복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6년 창업자인 제냐는 세상을 떠났다. 1940년대부터 원단공장을 맡아왔던 알도 제냐와 안젤로 제냐 두 아들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회사 규모를 꾸준히 확장했다.

참고도서=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명수진, 삼양미디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