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몇 장이고 써 내려가는 편지보다 기념일에 주고받는 짤막한 문장을 담은 엽서나 카드가 익숙하다. 그도 아니면 스마트폰 이모지나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주고받는 것이 더 일상적이다. 이전에는 편지가 마음을 주고받는 대표적인 매개체였다. 고백을 앞두고 마음을 표현한 편지를 좋아하는 사람의 사물함에 넣어 두기도 하고, 누가 누가 더 사랑하는지 표현하기 위해 썼다 지웠다 연애편지에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과도 펜팔로 금세 친구가 됐다.
좀처럼 편지를 쓸 기회가 생기지 않으니 편지지를 사는 경우도 드물다. 편지를 써야 할 때가 되면 그제서야 급하게 근처 편의점이나 문방구를 찾는다. 선택의 폭이 좁다 보니 편지지를 고르며 받는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을 떠올린다거나 특별한 디자인을 고려하기도 쉽지 않다. 편지지를 파는 가게 ‘글월’에서는 오롯이 편지에 집중할 수 있다. 글월은 편지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편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전문으로 판매한다. 글월의 대표와 디자이너가 직접 기획하고 디자인해 국내에서 제작한 것이다. 편지지 10여 장과 봉투 다섯여 장이 포함된 세트를 구매할 수 있고 낱장으로도 살 수 있다. 필기감이 좋은 볼펜과 만년필, 향수, 조명 등도 함께 판매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오래된 건물 4층에 있는 이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다. 창문으로 보이는 가을 하늘과 화분 등 사소한 풍경을 지나쳐 한 층씩 걸어 올라가면 프리지어 화병과 무심하게 놓인 카드 꾸러미가 반겨주는 403호 글월에 도착한다. 문을 열면 스무 평 남짓의 아담한 공간이 등장한다. 벽면에 칠해진 해 질 무렵 어스름한 노을빛의 페인트가 이곳의 감성적인 분위기를 살려준다. 한 발자국 내밀며 4층까지 오르느라 힘들었던 가쁜 숨을 들이마시니 빳빳한 새 종이 냄새처럼 기분 좋은 향이 코끝에 닿는다. 문과 마주 보고 있는 나무 서랍장으르 향하는 등 너머로 “서랍장을 열면 다양한 편지지가 있으니 자유롭게 열어보세요”라는 직원의 안내말이 들린다. 상냥한 안내에 내 서랍인 양 서랍장을 편하게 한 칸씩 열어본다. 펜으로 그린 일러스트 편지지부터 올리브·포도·모과 등 수채화 느낌의 과일이 그려진 편지지, 원고지 칸 모양 편지지, 꽃이 그려진 엽서와 카드 등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편지지가 실제 편지를 쓸 때처럼 보기 좋게 수평으로 누워 있다. 작지만 커다란 공간
펜팔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외국인과 펜팔 친구가 되어 외국어를 공부하기도 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구가 되기도 했다. 이메일, 카카오톡 등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펜팔은 점차 그 자취를 감췄다. 글월에서는 펜팔을 통해 모르는 이와 편지를 주고받는 서비스를 운영한다. ‘글월 Letter Service&shop’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1만원을 내면 원하는 분량만큼의 편지지와 봉투, 스티커를 제공해준다. 한쪽에 마련된 책상과 의자에서 편지를 쓴 후 카운터에 접수시키면 다른 이가 쓴 편지를 가져갈 수 있다. 우편비를 보태면 온라인으로도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곳에 비치된 몇 권의 책은 구매도 할 수 있다.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라는 책은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글월 문주희 대표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쓴 연애편지 50통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문주희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을 글월에서 읽고 싶었다며 일부러 이곳을 찾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렇듯 편지가 지닌 힘과 감성이 이곳의 정체성이 된다. 공간은 작아도 ‘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콘텐츠의 힘은 크다. 창밖으로 이불 빨래가 널려 있는 풍경이 보이는 빛바랜 건물에서 느낄 수 있는 서정적인 분위기, 편지지 한 장을 사도 수기로 작성한 영수증을 동봉해 봉투에 고이 포장해 건네주는 방식 등이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감성이다.
왜인지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누구에게 닿을지 몰라도 펜을 들어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봐도 좋겠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줄 테니.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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