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김용준 편집국장. 사진=한경비즈니스
김용준 편집국장. 사진=한경비즈니스
“전쟁터는 서로 알고 미워하면서도 서로 죽이지 않는 늙은이들이 내린 결정 때문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미워하지도 않는 젊은이들이 서로 죽이는 곳이다.”

프랑스 작가 폴 발레리의 말입니다. 이 말을 매일 떠올리는 요즘입니다.

스탈린의 말도 새겨봅니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하루에 수백 명씩 죽어나가는 소식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높은 수준도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전쟁에서 잃은 아들의 머리를 찾겠다고 찾아온 철천지 원수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 그리스인들은 감정을 정화한다는 의미의 카타르시스란 단어를 만들어냅니다.

한국 현대사도 전쟁을 빼고 말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더 그렇습니다. 제2차 대전 이후 미군이 직접 참전한 전쟁은 여럿 있습니다. 1950년대 한국을 시작으로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직접 전쟁을 치렀습니다.

미국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시작된 원인과 상황은 달랐지만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고, 민주주의라는 미국의 이상을 수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패전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막에서 희생시킨 9년의 이라크전쟁, 20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사실상 실패였습니다.

미국이 직접 전쟁을 치른 나라 가운데 의도대로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한국이 산업화를 이룬 원동력은 역시 수출이었습니다. 상상도 못 할 역발상으로 1980년대 조선, 1990년대 반도체, 2000년대 자동차를 세계적 수준에 올려 놓음으로써 한국은 수출 강국이 됐습니다. 이 토대가 있었기에 민주화에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틱한 성장은 수치로 나타납니다. 수출 초기인 1964년 1억 달러 수출하는 데 걸린 기간은 307일이었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1977년에는 그 시간이 2.7일로 줄었습니다. 6900억 달러를 달성한 작년에는 1시간마다 1억 달러어치를 수출하며 무역대국에 올랐습니다.

이 수출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무역액도 줄고,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선 지 오래입니다. 무역수지 기준으로 세계 200위로 추락했다는 조롱 섞인 통계도 수치로는 팩트에 가깝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공급망 재편,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등 외부적 변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게 지금이 아닐까 합니다.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중동정세가 심상치 않아지자 미국은 자신을 악마라고 칭했던 반미국가 베네수엘라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석유 매장량 세계 1위 국가인 베네수엘라에 대한 온갖 규제를 풀었습니다. 전쟁 장기화와 유가 불안정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이익을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는 게 국제정치인가 봅니다.

한국 수출의 역사도 발상 전환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모두가 반대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물류가 중요하다며 경부고속도로를 깔았습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은 조선소도 없이 유조선을 건조해냈습니다.

고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은 남들이 반도체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파고들어가는 트렌치 방식을 쓸 때 “쌓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며 스택 방식을 택해 선두로 치고 나갑니다. 이런 발상이 모여 수출 강국, 무역대국이 가능했던 것 아닐까 합니다. 산업화를 이룬 선대의 모험은 후대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반도체 이후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이 무엇인지를 다뤘습니다.

지정학적 모순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세계의 조정자이자 균형자를 자임했던 미국이 중국과 패권경쟁을 위해 포지션을 조정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혼란해진 세계에서 역발상과 치밀한 전략으로 수출 강국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