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블랙야크 아웃도어 전문 디자이너
가을의 절정인 11월이 되면 국내 곳곳의 명산에는 단풍 나들이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풍의 경계선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울긋불긋한 등산복이 눈에 띈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일상복인지 등산복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기능성을 가미한 스타일리시한 아웃도어 의류가 인기다. ‘중년교복’, ‘아재패션’의 대명사로 불리던 등산복이 세대교체를 이룬 셈이다.이 세대교체의 시작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웃도어 시장의 정점이었던 당시 7조원대로 시장규모가 팽창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무리한 경쟁 속 2조원대까지 시장규모가 축소되었다가 다시금 일상복과 등산복의 경계선을 허문 ‘고프코어룩’이 인기를 얻으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아웃도어의 전성기로 주목받는 직업이 있다. 가벼운 트래킹부터 등산, 암벽등반 등 다양한 아웃도어 아이템을 기획·디자인하는 ‘아웃도어 전문 디자이너’다. 대학시절, 산악부의 경험을 밑거름으로 아웃도어의 기능성과 스타일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낸 이유리 블랙야크 디자이너를 만나 직업의 세계를 들어봤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단풍 나들이객들의 수요가 늘어났어요. 덩달아 아웃도어 의류 매출도 늘어나는 시기이겠군요.
“그렇죠. 아웃도어 브랜드의 성수기가 가을부터 겨울까지라 지금부터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어요.”
디자이너들도 지금 바쁜 시기인가요.
“패션기업들은 한 두 시즌을 앞당겨 일하고 있어서 올 F/W시즌의 아이템은 이미 다 나와 있는 상태예요. 지금은 내년 아이템을 기획하고 있죠.” 일반 패션 디자이너와 아웃도어 전문 디자이너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옷을 만드는 건 같지만 기능성 소재로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차이가 있어요. 아웃도어 아이템은 보통 등산이나 트래킹 등 활동적인 야외활동을 할 때 입는 옷이거든요. 그래서 대부분이 기능성 소재로 제작되기 때문에 기획단계 때부터 이 점을 생각하고 만들어야 해요.”
구체적으로 아웃도어 전문 디자이너는 어떤 일을 하나요.
“말씀드린 대로 아웃도어 아이템은 기능성 소재를 활용한 의류인데요. 아웃도어 디자이너는 눈과 바람, 추위 등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야외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옷을 만드는 직업이에요. 가을·겨울철 주로 입는 패딩부터 이너웨어, 팬츠 등 다양한 아웃도어 아이템을 디자인 및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신기술, 신소재 접목해 아웃도어 의류 만들기도...
버튼 하나로 온도 조절 가능한 스마트 발열 시스템인 '야크온(YAK ON)' 개발
요즘 아웃도어 제품을 보면 신기술과 접목한 아이템들도 종종 보여요. 디자이너라면 기능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도 잘 알아야겠군요.
“그렇죠. 저희 브랜드에서 개발한 신기술이나 새로운 소재를 접목시키기도 하고, 이런 제품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 아이디어 단계서부터 출발하기도 합니다. 시장에 없던 기술을 접목한 아이템을 개발할 땐 디자인실과 R&D팀이 함께 협력해 상품 개발을 하기도 하죠.”
신기술을 접목해 개발한 상품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대표적으로 블랙야크의 스마트 발열 시스템 ‘야크온(YAK ON)'인데요. 요즘같이 기온변화가 클 때 스위치를 조절해 온도를 3단계까지 조절해 입을 수 있는 제품이에요. 별도의 보조배터리 전용 포켓과 디바이스를 연결하는 커넥터 역시 내장돼 있어 세탁이나 관리에도 편리한 장점이 있어요.”
신소재나 신기술과 같은 기능성 아이템과의 접목이 아웃도어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렇죠. 야크온 뿐만 아니라 방수·발수 기능을 갖추면서도 내구성이 뛰어난 고어텍스 재킷이나 냉감 티셔츠, 다운재킷 등 기능성 소재나 신기술을 많이 접목시키죠. 디자이너들 역시 디자인은 기본이고 늘 새로운 아이템을 생각하면서 상품을 기획하곤 합니다.” 하나의 옷이 나오기까지 업무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우선 시즌 전 디자인실, 기획팀 등 상품개발 관련 팀들이 모두 모여 심도 있는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합니다. 저희는 굉장히 자유로운 분위기라 이 과정에서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내놓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그 안에서 어느 정도 추려지면 각자 담당할 제품을 기획하는데, 이때 어떤 소재를 사용할지, 어떤 활동에 적합할지 등등 구체적으로 캐릭터를 그리듯 제품을 기획·디자인 하게 돼요. 이후엔 디자인 한 제품의 샘플링을 위해 ‘작업지시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작업지시서는 어떻게 써야 되나요.
“작업지시서에는 사이즈 스펙부터 디자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아트워크 사이즈 등이 작성돼야 해요. 말이나 글로 설명이 어려울 땐 사진이나 샘플을 첨부하기도 해요. 이 작업지시서로 샘플이 제작되고 공장에서 생산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작업지시서를 잘 써야 돼요.”
디자이너의 생각을 담아 작성하는 작업지시서
패턴사, 생산공장과 소통하는 창구이기도 해
어떻게 보면 작업지시서에 디자이너의 생각이 다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맞아요. 굉장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디자이너가 표현하고 싶은 부분들을 담아야 해요. 기본적인 사이즈도 일반복과 달라서 디테일하게 명시를 해주고, 소재부터 부자재 컬러 등 아주 세세하게 현장용어로 담아내야 해요.”
아무래도 패터너(patterner), 그리고 생산 공장에서 이해를 해야 되니까 작업지시서를 잘 쓰는 것도 디자이너의 덕목이 되겠네요.
“경험이 필요하긴 해요. 저도 처음에는 실수를 많이 했는데, 그런 실수를 통해 점점 잘 쓰게 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작업지시서를 잘 쓰기 위해서는 옷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꼼꼼해야 합니다. 글을 잘 쓰는 것 보다 표현을 잘하는 능력이 필요하고. 패터너와 생산 공장에서 쓰는 현장용어를 잘 알고 있어야겠죠.” 그 이후엔 어떤 작업을 거치나요.
“작업지시서가 나오면 패턴실에서는 종이로 패턴을 만듭니다. 원단으로 옷을 먼저 만들 수 없으니 종이로 하는 건데요. 패터너가 뜬 종이패턴을 원단에 맞춰 재단과정을 거칩니다. 이후 공제가 들어가고 기획한 부자재들을 넣어 옷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샘플이 나오게 되면 사내 품평회를 통해 제품에 대한 의견을 들어요.”
보통 디자이너들이 품평회 시간이 되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들었어요.
“제가 디자인한 아이템이 품평회 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개인적으론 아쉽긴 하죠. 근데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블랙야크의 모든 직원들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을 만들려고 모인 것이니까요. 오히려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리라 제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보통 시즌준비를 할 때 디자이너 한 명당 몇 개의 샘플을 제작하나요.
“전체적으로 보면 몇 백개의 샘플을 제작하는데, 디자이너 한 명당 30개 이상의 샘플을 기획·제작하는 것 같아요.”
기획단계서부터 디자인을 할 때까지 시간은 어느 정도 소요되나요.
“디자인 전 단계에서 기획이 돼 있는 상태라 빠르면 반나절, 한 몇 시간 만에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옷을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뭔가요.
“어떤 옷을 만들지를 결정하는 기획단계예요. 특히 아웃도어는 목적이 분명한 의류에 속하잖아요. 그 목적에 맞는 소재와 스타일에 맞는 기획을 잘 해야 좋은 옷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기능성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이 예뻐야 소비자들에게 어필이 되잖아요. 특히 최근에는 아웃도어를 일상복으로도 즐겨 입으니 말이죠.
“어릴 적부터 등산을 좋아했고, 대학시절 산악부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등산복 컬러나 스타일이 굉장히 튀면서 촌스러웠는데 지금은 굉장히 트렌디해졌죠. 저도 트렌드를 읽기 위해 시장조사를 통해 새로운 아이템에 대한 영감을 많이 받아요. 직접 산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입은 등산복을 유심히 보기도 해요.”
디자이너로 입사하면 어떤 일을 처음 하나요.
“보통 신입으로 입사하면 업무에 필요한 생산 용어부터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디자인을 스크랩하거나 시장조사하는 방법 등 업무에 관련된 내용을 배우죠. 차츰 적응이 끝나면 디테일이 크게 요하지 않는 티셔츠 디자인을 시작하고 직급이 올라가면서 고사양 또는 기술이 필요한 아이템을 담당하게 돼죠.”
패션 디자이너는 패션 전공은 필수
일러스트나 CLO, v-sticher 등 3D 프로그램 다룰 줄 알면 도움 돼
디자이너가 되는 방법도 궁금합니다.
“전문적으로 디자인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패션디자인학 전공은 필수예요. 요즘 현장에선 일러스트로 드로잉을 하기 때문에 관련 자격증이 있으면 도움돼죠. 특히 Clo나 v-sticher 등 3D 디자인 프로그램을 할 줄 알면 플러스 요인이 됩니다.”
아웃도어 디자이너로서 갖춰야 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디자이너라면 패션 트렌드를 잘 분석하는 능력이 필수지만 아웃도어 디자이너는 트렌드뿐 아니라 아웃도어를 직접 즐길 줄 알아야 해요. 자신이 만든 옷을 직접 입어보고 활동해보면 옷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거든요.”
직업의 장단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장점은 신상품을 가장 먼저 입어보고 필드테스트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저희 회사의 장점이기도 한데, 블랙야크에서 운영하는 아웃도어 커뮤니티 플랫폼 ‘블랙야크 알파인 클럽(BAC)’의 명산100 프로그램이 있어요. 명산이라고 등록된 산을 오르면 그 산의 높이만큼 BAC 코인을 적립해 주거든요. 그럼 매장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어요. 저같이 아웃도어 활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회사 복지를 쏠쏠하게 챙겨갈 수 있다는 점도 아주 큰 장점이죠.(웃음) 반면 단점은 늘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아닐까 싶어요.” 직업병이 있나요.
“평소에 ‘왜?’ 라는 질문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등산을 취미로 즐기고 있기 때문에 의류뿐만 아니라 용품도 직접 사용하고 있어요. 의류나 용품의 작은 디테일 하나 이유 없는 디자인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이건 왜 이렇게 디자인 됐을까?’라는 질문을 많이 하게 돼요. 그 질문을 토대로 저의 디자인에도 반영하는 편이고요.”
근무환경은 어떤가요.
“회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블랙야크는 직급 상관없이 좋은 아이디어라면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분위기예요. 대학산악부 활동을 통해 장기 산행, 암벽·빙벽 등반, 설산 훈련 등 다양한 활동을 해봤는데, 그 경험을 팀에서 존중해주는 편이에요.”
아웃도어 전문 디자이너의 비전은 어떻게 보시나요.
“다운, 냉감 등 아웃도어의 기술력은 곧 패션 시장 전체의 트렌드가 되지 않을까 해요. 아웃도어 디자이너만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은 어느 시장에도 접목시킬 수 있어 앞으로 몸값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요.(웃음)”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