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이야기 19

우리와 유사한 복권이 있을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그렇다는 주장이 상당수 등장한다. 학술논문이나 언론기사도 같은 견해를 표한다. 하지만 이는 복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광범위하여 발생되는 해석적 오류다. 이에 더해 북한이라는 특수 텍스트에 대해 한국사회가 지닌 난독증도 한몫한다.

온라인 자료들이 북한의 복권이라고 지목하는 대상은 크게 세 종류다. 1) 2017년 이후 대세를 형성한 ‘체육추첨’, 2) 수십 년에 한 번씩 발행되는 ‘복권형 국채’, 3) 소량 유통되는 숫자형 복권이 그것이다. 여기서 1)과 2)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복권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둔다. 먼저 1) 체육추첨에 대해 살펴보고 글 후반부에 2) 복권형 국채를 다루겠다. 건빵 속 별사탕, 체육추첨
“액정텔레비죤 2, 세탁기 1, 자전거 1, 선풍기 3, 증폭기 2, 고급이불 1, 고급담요 1, 여름이불 4.” 어수선한 글씨로 써 붙인 경품 목록이 얇은 유리창에 붙어 있다. 북한의 ‘즉시체육추첨’이 내건 상품이다. 칠이 벗겨져 나간 복권 판매점은 ‘체육추첨’이란 간판을 머리에 이고 있다.

가격은 장당 3000원. 1만원짜리 복권도 있지만 언감생심, 구매자가 거의 없다 한다. 총 2500장 발행이니 당첨확률은 15/2500. 해 볼 만하다. 복권판매소는 주로 운동경기장 주변에 있다. 운동경기를 보러 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어야 복권 살 여유도 있을 테니까.

북한의 ‘체육추첨’은 본격적인 복권이라고 볼 수 없다. 스포츠 대중화라는 김정은 지침에 따라 생긴 파생품에 가깝다. 건빵에 든 별사탕 혹은 아이스크림 위 토핑이라고나 할까. 농구, 축구, 승마 등 스포츠광으로 알려진 김정은이 급조한 치어리더라고 봐도 무방하다.

해외 유학파 김정은은 유화적 분위기 조성과 개방주의 사조 확산에 열심이었다. 남북경협이나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회담 이전부터 카지노 관광호텔, 스키 리조트, 경마장 건설을 서둘렀다. 스포츠 대중화나 복권판매도 이 같은 전환적 ‘무드’ 조성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농구를 예로 들어보자.

농구는 집권 초반 그가 심혈을 기울인 핵심적 ‘외교 전략’이었다. LA 레이커스 코비 브라이언트의 열렬한 팬이었던 김정은은 2013년 전직 시카고 불스 데니스 로드먼을 북으로 초대한다. 미국과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포석임과 동시에 국제 언론을 향해 자신의 소프트한 캐릭터를 과시하는 PR 이벤트이기도 했다.

원래는 마이클 조던이었으나 그가 정중히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이들의 첫 만남은 국제사회의 가십거리가 되었고 김정은의 ‘버디(Buddy)’가 돼 버린 로드먼은 NBA 출신 동료들과 함께 또다시 방북해 어린이 농구캠프를 개최하고 북한 농구팀과의 친선 경기도 가졌다. 비슷한 시기 평양 청춘거리 농구경기장에서 백두산배 경기와 함께 체육추첨이 실시되었다.

이런 일련의 장면들에 대해 영국의 BBC는 “정상 국가 코스플레이”라며 냉소했다. 핵개발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북한을 자유롭고 여유로운 사회로 연출하려는 젊은 지도자의 교란성 메시지는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정은과 기념촬영하는 데니스 로드먼과 전 NBA 선수들. (ABC)
김정은과 기념촬영하는 데니스 로드먼과 전 NBA 선수들. (ABC)
‘4·25 체육단’ 축구팀을 방문해 선수들과 악수하는 김정은. (AFP)
‘4·25 체육단’ 축구팀을 방문해 선수들과 악수하는 김정은. (AFP)
체육추첨 경품 논란
김정은 시대로 접어들어 가장 활성화된 운동경기는 축구다. 그가 ELP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특히 웨인 루니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정은은 2015년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선봉팀과 홰불팀 간의 경기 관람을 시작으로 북한 내 축구 붐 조성에 박차를 가했다.

분위기 속에 ‘축구경기승부알아맞추기추첨’이 시작됐다. 2017년 10월 ‘1부류 축구련맹전’ 13개 경기 각각에 대해 승부를 알아맞히는 방식이었다. 2018년에는 축구경기의 규모가 훨씬 커졌고 평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매주 축구경기가 열렸다. 경기장 주변 추첨복권과 먹거리 판매대 앞에서 웅성이는 인파들이 활기를 더했다.

그해 11월 ‘홰불컵’ 축구경기 승부맞추기추첨 광고 포스터에는 냉장고, 모바일폰, 19인치 LCD TV, 태블릿PC 등 꽤 푸짐한 전자제품이 경품 목록에 올랐다. 경기 후 선수들이 직접 좌석추첨과 승부예측추첨 당첨자들에게 경품을 전달하는 유인성 이벤트도 눈에 띈다.

승부맞추기추첨의 인기가 높아지자 상품 지급 절차나 조야한 품질에 대한 시비도 잦아졌다. 또 현지 판매원을 인터뷰한 데일리 NK는 고가의 TV나 가전제품 당첨자는 없고 선풍기, 자전거, 양복 옷감, 내복 등 저렴한 생활용품들만 지급됐다며 관계자들의 부정 의혹도 제기했다.

이런 의혹과 불만을 의식했는지 북한 체육성 산하 체육추첨관리소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는 입장권추첨과 즉석좌석추첨의 경우 “현대적인 추첨기계를 도입하여 공정하고 공평한 추첨이 보장된다. 그리고 당첨 확률이 향상되었다”고 강조한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종목알아맞추기, 번호알아맞추기, 콤퓨터경마즉시추첨 등 총 6가지의 새 추첨을 도입했다. 온라인 회원가입제와 전자추첨도 병행해 참여자의 폭도 넓혀왔다. 하지만 상품 지급에 대한 약속은 방기한 채 티켓 판매에만 열중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북한 체육성 체육추첨관리소가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 (체육추첨 캡처)
북한 체육성 체육추첨관리소가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 (체육추첨 캡처)
복권으로 오인된 북한 국채
북한 ‘복권’에 대한 오해의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역사연구단체의 한 논문은 2003년 5월 1일부터 발행한 ‘인민생활공채’ 복권의 당첨번호가 그해 12월 25일 관영 ‘조선중앙텔레비죤’을 통해 생방송된 사실을 지적하면서 북한에도 복권이 있음은 물론이고 TV를 통해 전국에 보도될 만큼 대중적인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전형적인 오독이다.

언급된 인민생활공채는 일반 복권이 아니라 북한 정부가 발행한 국채, 더 정확히 말해 ‘복권형 국채’다. 회사가 주식이나 회사채를 발행하듯이 국가도 세금 이외의 추가 수입이나 시중자금 흡수를 위해 국채를 발행한다. 국채 구매자에게는 통상 정기 이자가 지급되는데 그 대신 추첨을 통해 일정 금액을 지불하는 방식을 택하면 복권형 채권이라고 한다.

복권형 채권은 복권이 아니다. 복권은 상금 또는 상품 당첨을 목적으로 구매자가 돈을 지불해 티켓을 구매하는 저확률 고수익의 투기행위다. 반면 복권형 채권은 채권구매자가 낸 원금에 대해 지불하는 이자 대신 추첨에 따른 보상금(보통 이자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급하는 일종의 금융상품이다.

그렇다면 TV 생방송 추첨은? 채권 구매욕 자극을 위한 선전이었으리라 판단된다. 비슷한 시기 조선중앙통신에도 10년만기 ‘인민생활공채’에 관한 선전과 구매 권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했음이 확인된다. 2003년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로 재정위기에 봉착한 북한은 국채 발행을 통해 인민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시중 잉여자금 확보에 나섰을 것이다.

2003년 이전에도 북한은 두 차례에 걸쳐 복권형 국채를 발행한 적이 있다. 북한 최초의 채권은 1949년 ‘인민경제발전채권’이지만 최초의 복권형 채권은 1951년 한국전쟁 중 발행된 ‘조국보위복권’이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한 국채였으나 ‘복권’이란 이름이 혼란을 유발한다. 오늘날의 ‘티켓’과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된다.

다음은 1991년 ‘인민복권’이다. 조총련계 조선신보에 따르면 평양 내 통일거리 조성과 문화시설 확충을 목적으로 약 2억3500만 달러 규모로 발행된 복권형 국채였다. 그러나 액면가 50원권 1000만 개의 대규모 발행이었다는 점, 또 다음 해 1992년 7월 제3차 화폐개혁이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중의 구 화폐 회수가 목적이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채권이 많이 팔리도록 유도하는 ‘삐끼’ 역할을 맡는 것이 정기이자 대신 지급되는 추첨 상금이다. ‘인민복권’ 소지자는 추첨을 통해 1등 1만원(2000매), 2등 5000원(4000매), 3등 1000원(2000매), 4등 500원(1만 매), 5등 100원(200만 매)의 상금을 배당받았다. 추첨은 1992년 3월 25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렸고 2003년과 마찬가지로 TV 생방송과 더불어 각 지역 신문에 당첨 명단이 공개됐다.

보면 북한의 복권형 국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복권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북한에는 로또나 스크래치 즉석복권 같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보편적으로 유행하는 복권이 없다. 우리 즉석복권에 가장 가까운 형태라 할 수 있는 윳놀이추첨, 묘나무추첨 등은 2017년 이후 종적을 감췄다. 그러니 “북한에도 복권이 유행한다”는 가짜 뉴스는 가려서 들어야 할 것이다.

현상에 대한 해석은 관찰자의 지식, 문화적 편견, 이해관계 등과 동떨어질 수 없다. 역사도 과학도 마찬가지다. 북한 복권에 대한 오해는 우리 사회의 제한적 관심과 편향을 드러내는 반사경일 뿐이다.
체육추첨 상품 목록 (한국역사연구회)
체육추첨 상품 목록 (한국역사연구회)
평양시 골목에 설치된 체육추첨 판매소 (통일뉴스)
평양시 골목에 설치된 체육추첨 판매소 (통일뉴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