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미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4선을 한 대통령이 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는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대전을 승전으로 이끌었습니다. 트레이드마크는 노변정담(노변담화)이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를 통해 딱딱하지 않은 연설로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2월의 연설은 특별했습니다. 국민들에게 세계 지도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루스벨트는 연설 도중 여러 차례 “지도를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쟁의 상황을 설명하고, 왜 다른 국가를 지원해야 하는지, 참전해 연합군과 싸우지 않으면 미국에 어떤 위협이 되는지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세계지리 수업과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고립주의의 착각 속에 살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이들은 독수리가 타조의 전술을 모방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독수리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높이 날고 강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며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지정학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이를 바탕으로 한 자발적 협력이 전쟁 승패에 중요한 조건임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승전 후 맥아더 장군이 패전국 일본을 접수한 뒤 정규 교육 과목에서 지리를 없애버린 것도 군국주의 부활을 막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지정학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지리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가 있어야 정치와 정치의 연장선에 있는 전쟁을 이해하고, 잠재적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그런 시대 말입니다.
현대 지정학 얘기는 미국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대륙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천혜의 땅이었습니다. 이 강대국에 부족한 게 하나 있었으니 석유였습니다. 중동에 대한 적극적 개입의 배경이 됐습니다.
그런데 2007년 셰일 혁명이 일어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석유 지도가 달라졌고, 미국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됐습니다. 중동의 전략적 가치는 떨어졌습니다. 미국 내에서는 “중동에 돈과 사람을 이렇게 쏟아부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확산됩니다.
미국은 중동에서 발을 빼기 시작합니다. 그 상징적 사건이 이라크에 이은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였습니다. 도전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전선을 하나로 좁히려는 포석이었습니다.
물론 중동에는 미국이 지켜야 할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섬처럼 자리 잡고 있는 나라. 미국은 평화시스템 구축이라는 전략을 세우지요.
중동의 강국이자 문제아 이란은 핵협상을 통해 주저앉히고, 또 다른 강국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스라엘과 수교시켜 중동을 안정시키는 해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은 자체 내에 화약고 같은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살고 있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였습니다. 지도를 보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화약고 같은 나라였습니다.
결국 중동의 ‘빌런’ 하마스는 비극을 부른 기습공격을 감행합니다. 이스라엘의 무지막지한 반격으로 미국의 해법은 물거품이 되는 듯합니다.
유럽으로 가볼까요.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를 빼앗았습니다. 러시아에 귀속되기를 바라고,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니 큰 분쟁은 없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12개국으로 시작한 NATO는 이후 계속 확대를 거듭하며 30개국에 이르렀습니다. NATO의 러시아를 향한 동진(東進)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가입하면 러시아와 NATO가 국경을 맞대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러시아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러시아는 야만적 침략으로 응수했습니다.
이 밖에 아프리카에서 전쟁이 거듭되는 이유도 지도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종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선진국들이 국경을 직선으로 대충 그어버린 결과입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지도를 들여다볼 일이 생겼습니다. 김포의 서울 편입 논의가 불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선거철이 다가온 거겠지요. 하지만 지도만 놓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도가 북한과 접경지역이 될 뿐 아니라, 서울과 김포의 접점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논의는 김포를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줬습니다. 한강 이남에 있음에도 경기도 남쪽에 속하기 힘든 지리적 특성, 서울로 출퇴근하는 김포 시민들의 고통, 과거 화려했던 김포의 역사 등이 그것입니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역균형발전의 핵심은 지방을 서울처럼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탈중앙화도 한 방법이듯, 서울의 확산도 한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수도권의 범위를 충청, 강원권으로 확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 말입니다.
국가의 중대사인 만큼 치밀한 준비와 치열한 논의를 통해 수도권 전략과 국가 행정구역 개편의 계기로 활용하면 어떨까 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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