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장기화로 일본 수출 기업 실적 상승세
현지 분위기는 최악…기시다 지지율 20%대로 추락
한국 기업에도 부정적…가격 경쟁력 약화 우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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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엔저현상이 장기화하면서 쇼핑을 위해 일본을 찾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 일부 명품 브랜드는 한국보다 30만~50만원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 ‘비행기 값이 들지 않는 쇼핑’이라는 셈법도 나오고 있다.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수출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일본과 경쟁하는 산업군에서 엔저의 영향으로 일본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한국 제품의 입지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의외인 것은 일본 현지 분위기다. 관광객이 늘고, 성장률도 높아지고,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향해 가고 있지만 민심은 좋지 않다.

내수 부진이 심화하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본 국민들의 주머니 사정은 팍팍해지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지지율은 20%대까지 떨어졌다.일본 정부 구두 개입에도 ‘역대급 엔저’달러화에 대한 엔화 가치는 33년 만에 최저치 수준이다. 버블 경제 붕괴 직전인 1990년 엔화 가치가 급락해 달러당 150엔대까지 올랐다. 달러당 엔화 환율 상승은 엔화 가치가 하락한다는 의미다.

현재 엔화 가치는 1990년과 비슷하다. 미국 뉴욕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엔화 환율은 2021년 1월 1일 103.24엔에서 11월 20일 149.14엔까지 치솟았다.

같은 기간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1054.34원에서 866원으로 떨어졌다. 엔화가 870원 아래로 내려간 것은 2008년 1월 이후 15년 만이다. 당시 원·엔 환율은 100엔당 850원대까지 내려앉았다.

‘엔저’ 현상은 일본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수십 년 진행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0% 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금리가 낮으면 돈이 풀리고, 이는 물가상승으로 이어져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의 떨어지는 역동성, 낮은 임금 수준 때문에 소비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엔저를 설명하는 실질적인 경제지표는 미국과의 금리격차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꾸준히 올려왔다. 현재 미국 기준금리는 22년 만의 최고 수준인 5.25~5.5%이다.

반면 일본의 단기금리는 -0.10%로, 2016년부터 ‘0%대’ 금리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 회복을 위해 저금리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 1.0%까지 올랐으나 단기금리는 여전히 마이너스다.

그럼에도 일본 당국은 금리를 올릴 생각이 없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얼마 전 “일본의 소비자물가가 2.8% 수준이지만 내년도 이후에는 2%를 밑돌 것이다. 물가목표의 안정적 실현을 위해 금융완화를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금리를 올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엔저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배경이다.

물론 최근 들어 엔·달러 환율 상승세는 완화됐다. 지난 10월에는 심리적 저항선인 150엔을 돌파해 151.69엔까지 올라갔으나 11월 들어 소폭 하락했다. 일본 정부의 ‘구두 개입’ 등의 영향이다. 일본 증시 살아나고, 수출 기업 실적 개선엔저는 표면적인 일본 경제 지표 변화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규모가 대표적이다.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올해 상반기(4~9월) 경상수지 흑자는 12조7064억 엔(약 110조4000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동기 대비 3배에 달하는 규모로 반기 기준 역대 최고치다.

기업 실적도 상승세다. 지난 11월 16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일본 기업 1020곳의 평균 순이익이 3년 연속 최고 기록을 경신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들 1020곳(모회사, 자회사 모두 상장했을 경우 자회사는 제외)의 합산 순이익은 전년 대비 13% 증가한 43조4397억 엔, 영업이익률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두 번째로 높은 6%로 예상했다. 엔화 약세 덕분이다.

도쿄증권거래소 시가총액 1위인 도요타자동차의 실적으로 일본 기업들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도요타의 2분기(7~9월) 매출은 11조4400억 엔, 영업이익은 1조4400억 엔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4% 늘었고, 영업이익은 155% 급증했다. CNBC는 “우호적인 환율 변동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증시는 33년 만에 장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11월 20일 일본 도쿄증시에서 닛케이225 지수는 오전 10시쯤 3만3800 선을 돌파했다. 이 수치는 1990년 3월 이후 33년 만의 최고치다.

전망도 좋다. 21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은 자체 여론조사 결과 일본 기업들의 실적 상승세로 닛케이지수가 2024년 6월 말에 3만5000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했다.
역대급 엔저, 역대급 민심…그림자 드리운 일본
그런데 기시다 지지율은 20%대?일반적으로 통화가치 하락은 수입물가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엔저로 경제지표는 좋지만 일본 국민들은 그 혜택을 체감하지 못하는 배경이다. 내수 부진이 심화하고, 소비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일본 총무성 발표에 따르면 10월 변동성이 큰 신선식품을 제외한 도쿄 지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대비 3.3% 상승했고,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CPI도 2.7% 올랐다. 일본 정부의 CPI 상승률 목표인 ‘2%’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결국 일본은행(BOJ)은 2025년까지의 물가상승률 전망치까지 수정했다. BOJ는 10월 31일 ‘경제·물가 정세 전망’ 보고서를 발표하고 2025년까지의 CPI 증가율을 2.8%까지 끌어올렸다. 2023 회계연도(2023년 4월~2024년 3월)와 2024 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 CPI 증가율 모두 2.8%로 내다봤다. 종전 보고서(7월)에서 2023 회계연도 CPI 증가율을 2.5%, 2024 회계연도 CPI 증가율을 1.9%로 잡았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올랐다.

BOJ는 “CPI 상승률이 2024 회계연도까지 2%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과거 수입물가 상승에 따른 비용상승이 뒤늦게 반영(pass-through)됐고, 최근 원유가격 상승 영향이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025년 이후에는 이런 효과가 소멸돼 CPI 상승률이 다시 둔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엔저로 인한 수입물가 급등에 따라 중소기업 파산이 크게 늘면서 현지 분위기는 더 악화하고 있다. 일본에서 올 상반기 파산한 기업은 총 4042건으로 집계돼 5년 만에 최다 수준을 기록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지지율은 20%대까지 추락했다. 11월 20일 발표된 지지통신 조사 기준 기시다 지지율은 마이니치신문 21%, 요미우리신문 24%, 아사히신문은 25% 등으로 집계됐다.

이들 매체는 “기시다 내각 지지율은 2012년 자민당이 재집권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 “물가 상승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소득세 감면, 저소득층 현금 지원 등 경기부양책을 내놓았지만 기시다 내각에 대한 반감이 국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엔저 현상은 한국 기업들에도 부정적이다. 한국 기업들은 △철강·석유화학 △전기·전자 △자동차 △선박 △기계 △반도체 등 주요 산업에서 일본과 경쟁하고 있다.

특히 철강과 자동차 분야가 타격을 입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일본 철강 제품은 중국보다 품질이 좋으면서 가격까지 인하돼 단숨에 거래량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철강업계에 따르면 일본산 열연강판 수입 물량이 2023년(1~8월) 전년 동기 대비 42.5% 증가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엔저에 따른 일본 철강재의 경쟁력 회복은 국내 철강업에 구조적 리스크 요인”이라며 “엔저 효과를 통한 일본산 철강재의 국내 유입 확대는 국내 철강재 수급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엔저 현상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 철강재의 경쟁력은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