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추사 김정희는 나이 55세에 뜻하지 않은 송사에 휘말려 제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를 떠난다. 위리안치란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다.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 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 것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추사 김정희였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세상과 소통하게 해준 한 줄기 빛이 있었다. 바로 제자 이상적(李尙迪·1804~1865)이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서 김정희에게 보냈으며 청나라의 최신 학문과 동향을 지속적으로 전해주었다. 대역죄인으로 몰려 귀양 간 김정희에게 지극 정성으로 책을 보냈던 제자 이상적을 위해 김정희는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붓을 들었고, 1년 중 가장 추운 날(세한:歲寒)을 그린 그림이 세한도다. 김정희는 가장 추운 날을 그려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전한 것이다.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으로 이어지는 세한도의 발문(跋文) 중에는 사마천의 말을 인용하여 “권세와 이익으로 뭉친 자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소원해진다”라고 세상의 인심을 빗대어 말한다. 모두 권세와 이익은 자발적 연결과 자발적 끊음의 시작이다. 하지만 세상의 권세와 이익에 초연하여 자발적 연결과 자발적 끊음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으니, 그것이 흔치 않기에 지조를 논하고 절개를 칭찬하면서 세한도를 그려 준 것이다.
지금은 초연결 사회라고 한다. 스마트폰의 보급과 다양한 네트워크 플랫폼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네트워크의 홍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어디서든 SNS를 열심히 보느라 자발적 연결과 끊음에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다. 세한도 같은 휴먼 커넥션(Human Connection)이 새삼스러운 일이 되었다. 지금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초연결 사회이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인간은 접속이 가능함에 따라 생각과 사색하는 시간을 빼앗아 갔다. 비즈니스 문화에 관한 글을 쓰는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뇌의 가소성으로 인간은 쉽게 다른 매체에 적응하며 점점 더 그 매체에 종속됨으로써 깊은 사고와 책 읽기의 어려움에 봉착되어 결국 매체와 단절된 수도원의 수사나 깊은 계곡의 고승만이 고난이도의 인간 특성을 보존한다고 우려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 박사는 “정보의 풍요는 집중력의 결핍으로 이어지게 된다”라고 했다. 다른 사람과 접속을 통하여 얻은 많은 정보가 오히려 집중력 결핍을 유발하여 의사결정을 악화시키는 모순을 낳는 아이러니는 인간이 기계처럼 모든 정보를 일일이 읽고 확인하고 검증하여 사실을 판단하기보다는 직관적으로 자동화된 프로세스에 따라 결정하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추사 김정희가 강제적 고립 속에서 고도의 집중된 인간의 특성을 온전히 발휘한 휴먼 커넥션의 대표작 세한도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현대는 자발적 고립하지 않는 한 강제적 고립 같은 것은 없다. 한 번쯤 자발적 고립을 끊고 나를 돌아봄이 필요한 시기이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 한국방위산업협회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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