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콘텐츠 시장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2020~2021년 미국, 유럽 등 콘텐츠 시장의 중심에서 정상을 차지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2020년 2월 영화 ‘기생충’은 한국영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차지했다. 그해 8월 방탄소년단(BTS)은 한국 가수 가운데 처음으로 빌보드 메인 차트인 ‘핫 100’ 정상에 오르며 K팝의 역사를 새로 썼다. 2021년엔 황동혁 감독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며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2020~2021년이 찬란한 ‘영광의 시간’이었다면, 2022~2023년은 이를 기반으로 ‘다지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특정 작품과 아티스트만이 아니라, 다양한 작품과 아티스트가 골고루 이름을 알리고 사랑받았다. 덕분에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졌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 이젠 이 시간을 뒤로하고 새해를 맞이할 때다. 과연 2024년 한국 콘텐츠 시장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쉽게도 시장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글로벌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콘텐츠 시장 역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경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2’와 같은 대작이 공개되는 등 관심을 끌만한 요인도 충분히 존재한다.

2024 한국 콘텐츠 시장에 대한 전망은 ‘at the crossroads(갈림길 위에서)’란 말로 요약할 수 있겠다. 치열한 경쟁 속에도 완벽한 ‘굳히기’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일부 후퇴하는 등 정체 상태에 머물게 될까. K-콘텐츠가 그 갈림길 위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을지 궁금해진다. 1000억 투입한 ‘오징어 게임 2’…대작의 운명은?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정어 게임' / 사진=넷플릭스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정어 게임' / 사진=넷플릭스
K-콘텐츠 위상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콘텐츠 그 자체다. 내년엔 ‘오징어 게임’ 시즌 2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면서 전 세계 시청자들의 이목이 집중될 전망이다. ‘오징어 게임 2’는 현재 제작 중으로, 제작비는 전편에 비해 4배 넘게 늘어난 1000억원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인업도 더욱 화려해졌다. 이정재, 이병헌 등 기존 출연자뿐 아니라 임시완, 강하늘, 박규영, 양동근 등이 합류했다.

‘오징어 게임 2’뿐 아니라 다른 대작들도 잇달아 출격한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시즌 2도 내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10대 중심의 ‘학원 좀비물’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2022년 K-콘텐츠 흥행을 이끌었던 만큼 이번에도 기대가 높다. 2021년 ‘지옥’으로 흥행에 성공했던 연상호 감독의 신작 ‘기생수: 더 그레이’도 내년에 넷플릭스에서 방영된다. 동명의 일본 애니메이션 원작의 팬덤이 탄탄한 만큼 큰 관심을 받고 있다. 500억원 대작 ‘무빙’ 이후 한국 콘텐츠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디즈니플러스에서도 다수의 작품이 공개된다. 400억원이 투입된 ‘삼식이 삼촌’이 대표적이다. 배우 송강호가 데뷔 이래 처음 출연하는 드라마로, 변요한이 함께 캐스팅됐다. 유태오·탕준상 출연의 ‘세상에서 가장 나쁜 소년’, 이동욱·김혜준 출연의 ‘킬러들의 쇼핑몰’ 등도 내년에 디즈니플러스에서 방영된다.

글로벌 플랫폼에서 K-콘텐츠를 대거 편성하고 있는 만큼 새해에도 세계 시청자들의 관심은 일정 부분 유지될 전망이다. 하지만 덩치가 커진 만큼 흥행 부담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실제 올해 나왔던 기대작 중에선 흥행에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D.P.’, ‘스위트홈’ 등 K-콘텐츠 열풍을 이끌었던 작품들의 두 번째 시즌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시즌 1에선 장르적 특성을 잘 잘리면서도 참신한 시도를 해 호평을 받았지만, 시즌 2에 와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 그치며 차별화에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로 인해 2024년에 나오는 K-콘텐츠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만약 대작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한다면 한류는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반면 실패가 이어진다면 K-콘텐츠에 대한 세계 시청자들의 피로감이 점차 누적되고 부각되는 시기가 될 전망이다.
2편이 예정된 넷플릭스의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 사진=넷플릭스
2편이 예정된 넷플릭스의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 / 사진=넷플릭스
‘티빙-웨이브’ 합병, 넷플릭스 대항마 탄생할까

시장의 또 다른 주요 이슈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산업의 변화다. 글로벌 플랫폼의 물량 공세로 국내 OTT의 입지가 약화되고 있는 가운데 CJ ENM의 OTT 티빙, SK스퀘어와 지상파 3사의 OTT 웨이브가 합병을 추진한다.

그동안 플랫폼 부진은 K-콘텐츠 시장 전체에 부담으로 작용해 왔다.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글로벌 플랫폼이 K-콘텐츠 제작은 물론 방영권까지 대거 사들이면서 종속화 우려도 커져갔다. 토종 OTT들 역시 장르물 제작 등 다양한 시도와 대대적인 마케팅을 해왔지만 체급 자체가 다른 만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합병은 힘의 불균형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티빙과 웨이브의 월간활성이용자수(MAU)는 약 930만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넷플릭스(약 1137만 명)와 비슷한 수치다. 물론 중복 가입도 있었던 만큼 MAU 자체는 어느 정도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이용자들의 관심과 집중도는 훨씬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용자들은 방송국 주요 프로그램을 OTT로 보려면 티빙과 웨이브에 각각 가입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하지만 이젠 이를 편리하게 한 곳에서 볼 수 있게 됐다.

그동안 한류 열풍을 이끌어온 주역들이 한데 뭉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에 공급된 주요 콘텐츠 다수는 CJ ENM과 지상파 3사에서 비롯됐다. 즉 이들이 K-콘텐츠의 속성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적극 활용해 온 주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K-콘텐츠 주역들이 플랫폼 시장의 다이내믹한 변화까지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갈 길은 아직 멀다. 우선 양 플랫폼의 적자 개선이 시급하다. 그리고 양 플랫폼의 시너지를 극대화해 합병 플랫폼의 위력을 보여줄 수 있는 화제작 배출이 이뤄져야 한다. 만약 이 일들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앞으로 콘텐츠 시장은 거대 토종 OTT라는 든든할 날개를 얻게 될 것이다. 콘텐츠 흥행 코드는 ‘도화선’
매일 시시각각 콘텐츠가 쏟아지는 가운데, 대중들은 ‘옥석 가리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중 2024년 선택받는 콘텐츠의 다수는 ‘도화선’ 같은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욕망, 불편한 진실 등을 직관적인 소재를 다루고 내면의 깊은 감정을 자극하여 대중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 내는 작품 말이다.

침체된 영화 시장에 희망을 선사하고 있는 ‘서울의 봄’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12·12 군사반란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이 영화에 대해 입소문을 낸 주체는 중장년이 아닌 2030 관객들이었다. 교과서로만 주로 접했던 사건을 스크린을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점, 그 안에 담긴 욕망의 향연과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화 개봉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 자체가 새로운 도화선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는 올해의 주요 흥행 코드였던 ‘리얼리즘’과도 맞닿는다. 올해는 날것 그대로를 추구하는 일반인 예능 등이 큰 인기를 얻었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현실적이면서도 욕망과 분노 등 숨겨진 감정을 자극하는 콘텐츠에 많은 관심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갈림길에 선 사람이 갖춰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어떤 어려움에도 무너지지 않고,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며 내실을 다지는 일이다. K-콘텐츠 시장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크나큰 성장을 이뤄왔던 K-콘텐츠 시장은 정작 재정비의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 중요한 갈림길에 선 이때, 평소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동시에 보다 정교하게 시스템을 구축하고 체계화해야 한다. 2024년의 갈림길이 새로운 꽃길을 마련한 길로 기록되길 바란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