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예전에 멕시코에서 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다. 종업원이 수백 명에 달하는 회사의 대표로 있으면서 현지 멕시코 사람들과 일했는데, 그들에게 신기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멕시코는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빈부차가 벌어져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경제적 하층 계급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자산을 모아 신분상승(?)을 꾀하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생산직 직원에게는 월급 대신에 주급을 제공한다. 은행에 계좌가 없는 개인들도 많기 때문에 주급을 지불하는 금요일 오후에는 공장 한 켠에 전당포처럼 생긴 철창 사이로 주급을 현찰로 지급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주급을 현금으로 받은 그들은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대부분의 돈을 다 써버린다. 이러니 저축률은 바닥에 가깝다. 저축 자체를 하지 않거나 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 것이다.
몇 달을 지켜본 후에 안타까운 생각에 멕시칸 인사담당 매니저를 불러서 나름대로 조언(?)이라는 것을 했다. 한국도 예전에는 못사는 나라였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을 하여 부자 나라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하지만 그 멕시칸 매니저에게 돌아온 이야기는 충격적이었고, 다시금 경제의 기본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1년에 20%씩 비싸지는 냉장고 멕시코에서 어떤 사람이 냉장고를 사려고 했다가 1년 정도 냉장고 구입을 미루었다고 가정해 보자. 멕시코 은행의 금리를 10%라고 하면 냉장고를 사려고 준비했던 예산 1만 페소에는 그 이듬해에는 1000페소의 이자가 붙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식으로 절약을 하고 저축을 하면 돈을 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멕시코에서는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진다. 1년 전에 1만 페소였던 냉장고 가격이 20%가 올라서 1만2000페소를 줘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년에 1만 페소였을 때 냉장고를 샀다면 새 냉장고를 마련했겠지만, 어줍지 않게 저축을 한다고 냉장고 구입을 미룬 결과 본인이 가지고 있던 돈과 은행 이자를 더해도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자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저축은 무조건 손해라는 인식이 각인된 것이다.
중남미에 산재해 있는 짓다 만 집들의 비밀이 그것이다. 돈이 생길 때마다 벽돌을 사다 한쪽 벽을 쌓고, 다음에 돈이 또 생기면 창틀을 만들고, 그다음에 돈이 생기면 지붕을 만드는 식이다. 돈을 다 모아서 한꺼번에 집을 지으려면 예전보다 몇 배나 비용이 더 들어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높은 금리를 보장해도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는 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제학에서 이런 것을 ‘실질금리’라고 한다. 은행에서 예금자에게 약속하는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현실적인 금리를 실질금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책으로만 볼 수 있는 이런 일들이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실질금리 0.11%에 불과 우리나라의 경우는 1980년대 이후에 40여 년간 물가가 안정되면서 돈을 모으려면 저축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폭넓게 퍼졌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이런 실질금리 개념으로 따져보면 은행 저축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2009년부터 올해 10월까지 15년간 우리나라 순수 저축성 수신 금리, 다시 말해 예금금리는 2.25%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5년간 평균 물가상승률은 2.02%라 한다.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은 뺀 실질금리는 0.23%에 불과하다. 저축을 할수록 실질적으로 손해를 보는 중남미 국가 수준은 아니지만 저축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2021년 이후 최근 3년간의 현실은 참담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순수 저축성 수신 금리는 2021년 1.05%, 2022년 2.73%였다가 올해 10월에는 3.91%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물가상승률은 2.5%, 5.1%, 3.8%로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는 2021년 -1.45%, 2022년 -2.37%, 2023년 0.11%에 불과하다. 2021년과 2022년에는 저축한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된 것이다.
2022년이나 2023년의 예금금리 수준은 역대 평균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물가상승률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질금리가 플러스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쉽게 생각하면 은행에서 예금금리를 인상하면 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은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은행의 기본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어떤 사람들(A)에게 받은 돈을 다른 사람들(B)에게 빌려주고, B로부터 대출 이자를 받아서 인건비나 임대료와 같은 은행의 비용을 제하고 남는 이익을 예금금리 형식으로 A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금금리를 대폭으로 인상하게 되면, 대출금리도 따라서 대폭으로 인상하지 않는 한 은행은 손실을 보게 된다. 문제는 대출금리를 대폭으로 올릴 때이다. 대출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대출을 받는 이유가 그 자금으로 사업을 하거나 투자를 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경기도 불투명하고 투자에서 수익을 내는 것도 불확실하다면 고금리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돈에 대한 수요·공급의 원칙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은행에서 예금금리를 인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예금은 가장 안전한 재테크 수단이 아니다. 물가 수준에 따라 실질적으로 손실이 날 수도 있는 재테크 수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워런 버핏도 “저축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투자”라고 말한 것이다.
부동산 투자를 포함해서 실물에 투자를 하는 이유는 이런 위험을 분산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물가상승률이 높을수록 안전하다고 믿었던 저축이 더 위험한 것이고, 실물 투자가 본인의 자산을 지키는 더 안전한 수단인 것이다.
아기곰 (‘재테크 불변의 법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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