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대형 로펌에서 인간의 냄새가 난다면[EDITOR's LETTER]
‘동네변호사 조들호’, ‘천원짜리 변호사’, ‘신성한 이혼’ 등등. 변호사를 소재로 한 국내 드라마입니다.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능력 있고, 인간적인 그리고 소규모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주인공들의 세계관은 ‘법은 사람이 만든 최소한의 규칙이며, 약자를 보호하는 인간적 면모를 갖고 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반면 대형 로펌은 좀 다릅니다. 대부분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람 냄새는 사라지고, 자본과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예외지만. 문화는 대중의 정서를 반영합니다. 대형 로펌에 대한 인식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국에서 그 상징은 김앤장 법률사무소입니다. 뭔가 비밀스럽고,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어렵고, 법 천재들이 모여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것 같은 그런 이미지. 외환위기 이후 많은 기업들이 헐값에 해외로 팔려나갈 때 김앤장이 매수자인 외국 기업 편에서 자문한 것도 그런 이미지 형성에 한몫했습니다. 정부 관료들을 대거 고문으로 영입하며 논란이 된 것도 김앤장이었습니다. “김앤장 인사들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겠다”는 말까지 나왔으니까요.

그렇다면 돈과 권력의 논리만으로 오늘날 김앤장과 대형 로펌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을까. 조금 들여다보면 다른 면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특히 그 출발점에서는 말이지요.

김앤장 설립자인 김영무 변호사는 유학을 다녀온 후 1973년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립니다. 그때 나이 31세. 미국, 일본과 비슷한 전문로펌을 만들겠다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기창업을 한 것이지요. 그의 첫 번째 파트너는 장수길 판사였습니다. 당시 최연소 사시 패스 기록을 갖고 있던 그는 판사가 된 지 얼마 안 돼 운명의 사건을 맡게 됩니다. 서울대생들의 ‘신민당사 난입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전원 무죄를 선고합니다. 정권의 보복으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장 판사는 김영무 변호사와 함께 일을 시작합니다. ‘김앤장’에서 장이 붙은 배경입니다.

몇 해 후 한 명의 인재가 더 합류해 법조계에 화제가 됩니다.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마친 정계성 변호사. 당시만 해도 사법연수원 우수 졸업생은 판사로 가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정 변호사는 김앤장으로 왔습니다. 그는 장수길 판사가 무죄를 선고한 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정계성 변호사의 파격적인 선택은 갬앤장으로 인재들이 모여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지금도 김앤장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이 밖에 인권변호사의 상징인 조영래, 독재정권 아래서 판검사는 못 하겠다던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도 김영무 변호사가 직접 영입한 인재들이었습니다. 약간의 사람 냄새가 나던 시절이었습니다.

로펌 율촌의 창업도 인상적입니다. 1990년대 초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자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시까지 사상 최대인 1300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합니다. 현대그룹은 김앤장에 사건을 맡겼습니다. 담당은 우창록 변호사였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압박에 김앤장은 사건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우 변호사는 의뢰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며 김앤장을 나와 개인변호사 사무실을 차립니다. 법무법인 율촌의 시작이었습니다. 몇 년간의 공방 끝에 완벽한 승소 판결을 이끌어내며 율촌은 단숨에 조세 부문 강자로 올라섭니다. 전문성과 변호사의 소명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이 밖에 “로펌은 경제논리 이전에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법률문화를 정착시키는 가치집단의 위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 태평양, 30대 변호사들이 모여 벤처 전문 로펌을 표방하고 최초로 소속 변호사의 공익적 활동을 의무화한 진취적 풍토의 지평의 출발도 법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로펌과 변호사들이 받아든 숙제도 만만치 않습니다. 인공지능(AI)의 희생양이 될 직업 가운데 맨 앞순위에 변호사가 있었다는 것은 오래된 얘기입니다. 대체속도는 챗GPT 등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더 빨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을 찾으려면 AI와 변호사의 차이점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 냄새가 아닐까 합니다. 법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을 위해, 사람이 집행합니다. 인간의 얼굴을 갖는 게 당연한 이유입니다.

능력과 따듯함을 겸비한 집단에 대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호감과 존경을 느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변호사가 그런 직업이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