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근사하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시골 마을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이런 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조용하고, 평화롭고…” 탄성을 짓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친구는 “좋아 보이냐?” 하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저 안에 들어가 봐. 이웃끼리 서로 원수지간일 거야. 자기 논밭에 물 대는 일로 낫 들고 으르렁거릴 수도 있지.”

친구의 살벌한 표현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토록 목가적인 마을 풍경을 두고 하는 모진 말이라니. 하지만 평소 유순한 성품의 그였던 터라 뭔가 근거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고교까지 농촌생활을 한 친구의 일성은 도회생활만 해 온 내가 넘볼 수 없는 위엄을 지녔다. 관광객의 특별한 시선
아닌 게 아니라 원거리 조망이 더 만족스러울 때가 있다. 가까이서 보고 속사정을 알면 추하고 복잡한 것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경멸을 낳는다”는 외국 속담도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 유지가 오히려 관계에 도움된다는 역설을 잘 표현한다. 결혼도, 가족도, 연인이나 친구 사이도 그런 경우가 많다.

여행객의 시선은 이 ‘적절한 거리’를 보장한다. 제한된 시간 안에 관광특화 공간 중심으로 이뤄지는 접촉이니 현지 속사정까지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멋지고 특이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려는 관광의 쾌락법칙은 (에코·다크 투어리즘 제외) 방문지의 내밀한 사정에 대한 무심함으로 이어진다.

외지 관광객의 피상적 경험이 반드시 무디거나 열등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타인의 직관이 당사자의 자기 인식보다 날카로울 때도 있듯이, 외부 방문자의 시선은 거주자에게 보이지 않는 구조를 포착하는 예리함을 장착하고 있다.

상식이 현지의 야만으로 돌변하기도 하고 거주민의 질서가 이들에게는 당혹스럽거나 불쾌한 무질서가 되기도 한다. 상식이 다른 상식과 충돌하고 자신의 당연성이 거부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관광객들은 한시적 문화인류학자가 된다.

귀국하는 관광객의 가방은 각종 선물과 기념품들로 가득하다. 때론 추억과 함께 현지에서 생긴 질문들도 챙겨 온다. 하지만 되돌아온 일상은 숨가쁘다. 질문 보따리를 풀어보지도 못하니 해답을 찾을 겨를도 없다. 궁금증은 누적되지만 그 해소는 늘 연기된다.

<일본 관광객이 물었다>는 누적된 질문들, 그 지연된 해소에 응한다. 일본은 왜 아직도 현찰 중심인지, 식당에서는 왜 숟가락을 안 주는지, 길거리는 어찌 그리 깨끗하며 실내 흡연에는 왜 너그러운지, 언제부터 매운맛이 유행했으며 호스트바는 왜 이리도 많은지,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왜 이토록 적으며 신장은 왜 우리보다 작은지.

수많은 “왜?”들은 표면상 단순해 보일 수 있으나 속을 들춰보면 의외로 묵직한 구조와 연결된 것들이 많다. 이렇게 한국 관광객들이 던지고 간 흥미로운 질문들을 수거해 문화인류학적으로 업사이클링(upcycling)해 볼 예정이다.
도쿄 아사쿠사에서 일본 전통의상 유카타를 입고 사진촬영 중인 외국인 관광객/사진=니케이 아시아
도쿄 아사쿠사에서 일본 전통의상 유카타를 입고 사진촬영 중인 외국인 관광객/사진=니케이 아시아
일본관광 붐과 역사적 반전

2023년 한국인의 일본관광은 가히 선풍적이었다. 1분기에만 160만 명, 연말까지 집계하면 700만에 달한다. 출국자 전체의 30%가 일본을 향한 것이다. 2023년 10월 방일 외국인 250만 중 25%에 육박하는 60만이 한국인이었다. ‘물 반, 한국인 반’이라는 후쿠오카는 ‘경상남도 후쿠오카시’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혹자는 엔저 효과로 설명하지만 이는 만국 공통사항이다. 한·일 정상회담이 호재로 작용했을 수 있으나 후쿠시마 오염수라는 악재가 상쇄했을 테니 경제나 정치 요인만으로 일본관광 붐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문화 국력의 평형효과’로 접근해볼 만하다. 두 국가 간 수직적 문화 위계가 해소되면서 일본이 한국인에게 시쳇말로 “만만해”진 현상 말이다.

정치역사적 앙금과는 별개로 한·일 간의 문화 침투는 넓고 깊다. 물론 20세기 들어 영향력의 삼투압은 일방통행이었다. 한국은 일본을 문화적 레퍼런스로 삼았지만, 그들의 시선은 한국을 향하지 않았다. 이런 기울어짐은 해방 후 더 심화됐다. 반일과 극일의 공식 모토와는 반대로 우리의 방송, 언론, 연예, 언어, 패션, 미용, 가전, 식료품은 일본과의 동기화를 지향했다.

더 냉정히 말해 한국의 대중문화와 일상 영역 상당 부분은 일본의 그것을 추종했고, 편의적으로 복제했으며 결국 자발적 ‘친족화’로 귀결됐다. 그렇게 라멘은 라면으로, 망가는 만화로, 엔카(演歌)는 트로트로, 캬바쿠라 (キャバクラ)는 룸살롱으로, 가라오케는 노래방으로, J팝(pop) 모형은 K팝(pop)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 대중문화의 공식 개방이 시작된 1998년 조선일보의 한 사설은 ‘왜색문화’의 전면화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반전은 일본 장기침체가 본격화된 2000년대 초반 시작됐다. 그로부터 20년, 이제 상당수 일본 여성과 젊은이들이 한국의 문화 포맷을 추종하고 모방한다. 춤과 음악, 드라마와 음식을 넘어 패션, 미용, 라이프스타일까지 번졌다. 애정과 동경이 중심이지만 긴장감과 경쟁심도 엿보이며 부러움과 질투도 다분하다.

문화 영향력의 역류는 양국의 기술력과 체감 경제력이 대등해지는 시점에 일어났다. 자동차와 반도체, 가전과 스마트폰, 의료와 사회복지도 드라마나 화장품, 스포츠와 패션 못지않게 일본에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시점. 여기에 일시적이나마 일인당 GPD와 물가도 역전돼 버린 것이다.

2017~2018년 서로의 키와 눈높이가 평형을 이루자 한국인들의 일본여행은 폭증했다. 2013년 250만, 2015년 400만이던 수치는 년 700만으로 도약했다. 당시 환율은 지금보다 높은 1대 10.7 수준이었지만 한류로 고양된 문화적 자존감이 뒷받침해 주었다. 이후 ‘NO 재팬’과 코로나19 휴지기를 거친 후 2023년 단숨에 2018년 수준을 회복, 경신한 것이다.

관광지로서 일본이 지닌 매력은 명백하다. 가깝고 쾌적하면서 볼거리, 먹거리도 풍성하다. 하지만 ‘싼 맛’에 편안히 즐길 수 있는 일본이라니! 아무도 예상치 못했으나 모두가 맛보고 싶었던 ‘통쾌한’ 반전. 이 역사적 순간을 체험하고 누리고자 하는 대중의 평형심리는 그 어떤 반듯한 논리로도 쉽게 재단하거나 질책할 수 없다.
'일본 관광객이 물었다' 연재를 시작하며 [최정봉의 일본 관광객이 물었다]
일본관광 경험의 해석

다소 문제적 발언이나 한 지인은 자신의 일본방문을 “동남아 가는 기분”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마조마 계산기 두드리지 않고 주눅들지 않는 일본관광, 그것은 단순 환율 문제가 아니었다. 문화 국력이란 이런 것이다. 국적의 힘도 이렇게 무섭다. 해외 여행만이 아니라 비즈니스, 구직, 취학, 결혼 등 국제무대에 선 개인의 가치, 심리, 행위, 시선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문화 국력이라는 ‘평형수’를 가득 채우고 떠난 일본여행, 거기서 추출해 낸 한국인들의 “왜?”는 그 내용과 의미가 각별하다. 가깝지만 멀고, 다르지만 닮았고, 갈라진 만큼 접속되어 있는 숙명의 이웃이 느낀 문화적 이물감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들의 체험과 질문에 대한 체계적 해석·해설 틀거리들은 미흡하다.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유재순의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로 이어진 체계적 문화해설은 아쉽게도 공백기에 접어들었다. 언론의 관심은 일본의 정치경제나 고령화, 지방자치, 복지정책에만 편중되어 있다.

물론 애니메, 망가, 게임, 로봇, 캐릭터, J팝 덕후들의 등장과 더불어 소설, 드라마, 온천, 열차, 등산, 라멘, 우동 등에 일가견을 지닌 ‘고수’들이 급증한 것은 사실이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일본에 관한 정보나 지식은 상향평준화되었지만 깊이 있는 담론과 통찰력 있는 해석들은 오히려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관광객이 물었다> 시리즈는 한국 관광객들이 제기하는 날카로운 “왜?”를 일본 사회의 주요한 ‘결’들과 연계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방적 해설이기보다는 공동탐구 정도로 여기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지나친 일반화는 경계하겠지만 일정한 경향성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개별화 역시 거리를 두겠다. 모든 것이 ‘케바케(case by case)’라는 허무한 진술이라면 해석 자체가 필요 없으니 말이다.

또 한가지. 일본과 한국의 문화현상에 대해 비교·대조할 경우 “예로부터 민족성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근본주의와는 한 치도 타협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일러 둔다. 거론될 모든 현상들은 ‘피’라든가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시기 일정한 조건과 상황 속에 ‘사회적’으로 형성된 잠정적 결정체로 다뤄질 것임을, 또 독자들도 그렇게 이해해 주기를 당부한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