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 포스트 / 사진=티빙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 포스트 / 사진=티빙
한 번 죽었지만, 12번을 더 죽게 된다. 지난 12월 첫 공개된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의 오리지널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의 주요 내용이다. 7년 차 취업준비생 이재(서인국 분)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이재는 그 죄로 죽음(박소담 분)의 분노를 사게 되고, 12번 다시 살고 다시 죽음을 경험하는 벌을 받게 된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취준생의 이야기, 삶과 죽음을 오가는 이야기 등은 이미 다른 작품에도 자주 나왔었다. 콘텐츠 시장에서 적극 활용되어 온 전형적인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의 서사 구조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볼수록 참신하게 느껴지고, 다음 인생과 죽음이 궁금해진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겁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공개 직후 2주 연속 티빙 주간 유료가입기여자수 1위를 기록했다.

티빙의 ‘이재, 곧 죽습니다’, 쿠팡플레이의 ‘소년시대’ 등 한국 토종 OTT의 오리지널 콘텐츠가 잇달아 호평을 받고 있다. 이 작품들에 대한 관심은 비슷한 시기 공개된 글로벌 OTT 넷플릭스의 ‘경성크리처’ 등에 비해 훨씬 저조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반전의 기록을 쓰고 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가능했던 걸까. 국내 OTT의 최근 화제작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기시감 강한 글로벌 대작 누르고 호평

글로벌 OTT가 내세우는 블록버스터급 콘텐츠의 기세를 꺾고 승기를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작품들엔 대규모 제작비가 들어간 만큼 처음부터 엄청난 스펙터클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기 때문이다. 70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들어간 ‘경성크리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서사가 그만큼 충족되지 못하면 실망감도 커지게 되는 법이다. 특히 ‘경성크리처’는 멜로, 모성애 등 신파적인 요소가 반복되며 ‘기시감(旣視感)’이 강하게 들게 했다.

반면 토종 OTT들의 최신작들은 ‘미시감(未視感)’을 집중 공략하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미시감은 평소 익숙하던 것이 갑자기 낯설게 다가오는 느낌을 이른다. 자주 나온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다채로운 설정과 탄탄한 서사로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는 방식이다.

‘이재, 곧 죽습니다’는 삶과 죽음을 오간다는 점에선 기존 회귀물과 비슷하다. 하지만 12번의 죽음을 반복하면서 이재는 다양한 캐릭터로 환생하게 되며 색다른 재미를 준다. 재벌 3세(최시원 분)부터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학생(김강훈 분), 모델(이도현 분), 갓난아이 등이다. 주인공의 얼굴이 바뀌는 설정은 이미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뷰티 인사이드’에도 나왔었다. 하지만 ‘이재, 곧 죽습니다’에선 단순히 얼굴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매번 완전히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재미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원작 웹툰이 따로 있음에도 웹툰에 없던 캐릭터를 다수 등장시킨 것도 효과를 발휘했다. 먼저 공개됐던 파트 1(1~4화)에 나온 캐릭터 절반은 웹툰에 없던 인물들이다. 특히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죽음을 피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아기로 환생한다는 설정을 넣어 참신함을 더했다. 여기에 아동학대라는 사회적 메시지까지 함께 담아 호평을 받았다.

12번의 환생을 통해 여러 장르를 한 작품에서 골고루 즐길 수 있도록 한 것도 독특하다. 12명의 캐릭터가 모두 죽음을 앞둔 인물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스릴러가 작품의 바탕에 깔린다. 그리고 액션, 로맨스, 누아르, 학원물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돼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쿠팡플레이가 선보인 ‘소년시대’ 역시 미시감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의 장르 자체는 학원물에 해당한다. 학원물은 글로벌 OTT를 포함한 여러 플랫폼과 매체에서 MZ세대를 타깃으로 많이 선보였던 장르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아예 시대를 달리해서 차별화를 시도했다. 1989년을 충청남도를 배경으로 삼아 레트로 감성을 극대화했다.

게다가 세련되고 멋진 캐릭터가 아니라, 투박하면서도 살짝 모자란 느낌을 주는 캐릭터를 내세워 웃음을 준다. 안 맞고 사는 게 일생일대의 목표인 병태(임시완 분)가 그 주인공이다. 병태가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싸움을 잘하는 전설의 인물 ‘아산 백호’ 정경태(이시우)로 오해를 받게 되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폭력성이 짙어 호불호가 강한 학원물에 추억의 레트로 감성,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코믹한 분위기를 가미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소년시대’는 네이버에서 많이 찾는 드라마 1위, 콘텐츠 커뮤니티 키노라이츠 통합 콘텐츠 순위 1위에 올랐다. ‘슬리퍼 히트’ 탄생이 곧 토종 OTT의 힘
드라마 '소년시대' 포스터 / 사진=쿠팡플레이
드라마 '소년시대' 포스터 / 사진=쿠팡플레이
OTT라는 플랫폼의 가치는 곧 콘텐츠에서 나온다. 특히 자체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의 성공 여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종 OTT는 글로벌 OTT에 비해 늘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 OTT가 대작을 쏟아내면서 시청자의 관심과 화제성을 빼앗겼다. 이 같은 이유들로 토종 OTT는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었고, 누적된 적자를 극복할 실마리를 찾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답에 점차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시감을 내세운 서사로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대작에서 시청자들이 느꼈을 공허함을 대신 채워줬다. 미시감은 곧 ‘낯선 익숙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방점은 익숙함보다 낯선 것에 있다. 완전히 이질적이진 않고 보편성을 갖추고 있지만, 기존의 콘텐츠에선 쉽게 보지 못한 설정들로 새로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낯선 익숙함은 대표적인 콘텐츠 성공 공식으로 꼽힌다. 여전히 규모 면에선 글로벌 OTT에 밀리지만, 콘텐츠 서사 안에서 이 성공 공식을 끊임없이 접목하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지난해 연말 새로운 오리지널 콘텐츠로 시청자의 관심을 받게 된 토종 OTT. 새해엔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이젠 오랜 정체기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성장을 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물론 새해에도 시장 상황은 녹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OTT의 화력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 2’, 애플TV플러스는 ‘파친코 2’ 등을 내세워 대대적인 공습을 이어 나간다. 글로벌 OTT에 맞서 토종 OTT도 다양한 전략을 짜고 있다. 티빙과 웨이브는 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울 예정이다. 넷플릭스에서 먼저 시작한 반값의 광고형 요금제도 티빙에서 도입할 예정이다.

이 같은 다양한 노력을 진행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콘텐츠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3 OTT 이용행태조사’에 따르면, 유료 OTT 플랫폼 이용자들은 플랫폼 구독 이유를 묻는 질문에 ‘다양한 동영상 콘텐츠’(71.2%)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콘텐츠를 선택하는 기준도 ‘콘텐츠 주제 및 소재’(73.8%)라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았다. 결국 OTT의 핵심 경쟁력은 콘텐츠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콘텐츠의 유효 기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으며, 많은 작품들이 나왔다가 금세 잊혀지곤 한다. 그럼에도 한국 시청자들은 좋은 콘텐츠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으며, 이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야기 중독자’라고 할 만큼 이야기를 좋아하고, 확산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재, 곧 죽습니다’, ‘소년시대’와 같은 ‘슬리퍼 히트(sleeper hit)’를 끝내 발견해 내고야 마는 비결이다.

슬리퍼 히트는 흥행할 줄 몰랐지만,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게 되는 작품을 의미한다. 시청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여러 슬리퍼 히트가 탄생하게 된다면, 토종 OTT의 브랜드 가치는 갈수록 높아지게 될 것이다. 미시감을 장착한 오리지널 콘텐츠가 주는 감동, 그것을 알아보고 슬리퍼 히트로 만들어내는 한국 시청자들의 힘. 그것이야말로 K콘텐츠, 나아가 토종 OTT가 살아남고 확장할 수 있는 거대한 동력이 되지 않을까.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