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대신 ‘콤팩트시티’로 재개발, 도보권에 도시기능 집약해
초고층 설계 통해 연면적 대비 녹지공간 넓혀, 자연·주변환경과 조화

일본 도쿄 소재 복합시설인 아자부다이힐스 전경. 사진=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일본 도쿄 소재 복합시설인 아자부다이힐스 전경. 사진=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살바도르 달리의 걸작 ‘기억의 지속’이 현실 세계의 건축물로 구현됐다. 2023년 11월 24일 문을 연 아자부다이힐스의 얘기다.

일본 도쿄 도심에 들어선 이 공간은 지상과 지하, 층 간 구분이 모호한 한 폭의 초현실주의 작품이다. 평지를 거닌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오르막을 오르는 중이고, 지하 3층으로 들어섰는데 반대쪽으로 나서니 지상이다.

명품 숍과 유명 레스토랑이 들어선 파빌리온은 형태가 보행자의 눈높이에 맞춰 물결처럼 오르내린다.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기억의 지속’에 등장하는 늘어진 시계처럼.

중심 건물인 모리JP타워의 높이는 330m. 오사카의 아베노 하루카스 빌딩을 30m 차이로 제치고 일본 최고층 빌딩이 됐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품은 초현실주의적인 공간이지만 아자부다이힐스는 이웃 건물들을 기죽이거나 주변 풍경 속에서 이물감을 주지 않는다. 언덕을 깎은 평지 위에 욱여넣은 거대 빌딩군이 아니어서다.

아자부다이힐스는 원래부터 존재한 듯한 공간을 목표로 지어졌다. 언덕이었던 지형을 최대한 살려 기존의 풍경을 최대한 해치지 않으려 했다. 초고층 건물은 도자기 같은 곡선으로 처리해 위압감을 최소화했고, 저층부 상업시설은 해 질 녁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는 동네 뒷산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자부다이힐스가 높이 못지않게 공간으로 주목 받는 이유다.

아자부다이힐스는 초고층 빌딩군이 아니라 도심 속의 작은 도시다. 3개의 초고층 건물과 1400세대의 아파트 단지, 여의도 파크원보다 큰 오피스, 하남 스타필드와 맞먹는 상업시설, 병원, 학교로 구성됐다.

기존에 없던 시도로 기존에 있었던 것 같은 공간을 창조한다는 모순된 목표를 영국의 건축가 겸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이 달성했다. 한강 노들섬을 한국의 산을 형상화한 ‘사운드스케이프’로 꾸미자고 제안해 한국에도 친숙한 인물이다.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그의 활동영역은 런던 2층 버스, 구글 신사옥 ‘베이뷰’, 뉴욕의 인공섬 ‘리틀 아일랜드’ 등 도시의 소품에서부터 건축물, 인프라까지 경계를 따지지 않는다. 아자부다이힐스의 저층부와 흘러내리는 듯한 파빌리온, 지하 상업시설에서도 허를 찌르는 헤더윅의 발상을 즐길 수 있다.

이는 애시당초 건축물을 설계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헤더윅은 자신이 아자부다이라는 언덕에 초고층 건물과 파빌리온, 지하 쇼핑몰이 어우러지는 유기체를 창조했다고 여겼다. 헤더윅스튜디오도 자사의 포트폴리오를 소개하면서 아자부다이힐스를 ‘공간’ 부문에 올려놓았다. 도시재생이냐 재개발이냐
도쿄 아자부와 롯폰기, 도라노몬은 일본 최고의 금싸라기땅을 다투는 지역이지만 서로의 흐름이 단절돼 있었다. 세 지역 사이의 연결 고리인 아자부다이가 엉겨 붙은 핏덩이마냥 혈액순환을 막고 있어서다.

부촌과 판자촌이 공존했던 옛 성북동처럼 아자부다이 한 편에는 러시아대사관, 일본 외무성 이쿠라공관, 도쿄아메리칸클럽 등 외교와 사교의 공간이 몰려 있는 한편 반대편에는 낡은 목조 주택촌이 있었다. 소방차도 들어가기 힘든 좁은 골목이 가파른 언덕 구석구석으로 이어져 있어 일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미나토구의 순환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 응어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수명이 다한 도시의 원래 모습을 가능한 한 보존하면서 활력을 주입하는 도시재생이냐, 허물고 새로운 도시를 탄생시키는 재개발이냐는 일본에서도 오랜 논란거리다.

아자부다이힐스는 도심의 동맥경화를 유발하던 아자부다이의 핏덩이를 덜어내는 재개발을 선택한 결과였다.

도시를 재생시킬지 재개발할지를 결정할 때 따져야 할 수많은 요소 가운데 일본은 인구 변화를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른 저출산·고령화를 경험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올해 1억2500만 명인 일본 인구의 절반은 50세를 넘는다. 2027년에는 일본인 3명 가운데 1명이 65세 이상 고령자가 된다. 2040년이면 일본인 7명 가운데 1명은 80세 이상 노인이다. 일본에서 가장 젊은 도시 도쿄도 급격히 늙는다. 2050년이면 도쿄도민 3명 가운데 1명이 65세 이상 고령자로 채워진다.

성숙기인 일본 경제와 고령자가 소비자의 중심이 되는 라이프스타일 변화를 감안해 아자부다이힐스가 제안한 모델이 ‘콤팩트시티’다. 콤팩트시티는 다양한 도시 기능을 한데 모은 도심 속의 작은 도시를 말한다.
언덕지형을 살려 설계된 아자부다이힐스 모습. 사진=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언덕지형을 살려 설계된 아자부다이힐스 모습. 사진=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일하고 즐기고 배우고 쉬며, 나아가 거주하는 것까지 인간 생활의 모든 기능을 도보권 내에 집약시키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또 이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또 다른 집약을 부르는 자력이 된다는 개념이다.

집 한 채, 건물 한 동을 다시 짓는 것으로는 어림없고 주택가나 빌딩군을 건설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도시 기능의 장점을 모두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가고 싶고, 살고 싶어하는 입체 녹원 도시(버티컬 가든 시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수백 명의 소유자들로부터 규모 있는 부지를 확보하고, 여기에 초고층 빌딩을 올릴 필요가 있다. 34년이 걸린 아자부다이힐스 개발 프로젝트 대부분을 300여 명에 달하는 소유자의 동의를 받는 데 쓴 이유가 여기 있다.

왜 초고층 빌딩일까. 2층짜리 주택 300채를 지으면 건폐율(건물면적/대지면적) 50%의 평범한 주택가가 된다. 똑같은 입지에 50층짜리 초고층 건물을 올리면 연면적(하나의 건축물 각 층의 바닥 면적의 합계)은 비슷하면서 건폐율을 3%로 줄일 수 있다. 나머지 공간을 전부 녹지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도시 기능을 도보권에
아자부다이힐스의 부지는 8만1000㎡로 11만6000㎡인 롯폰기힐스의 70% 수준이다. 하지만 54~64층짜리 초고층 빌딩 3동을 올림으로써 연면적 86만1700㎡의 규모 있는 도시가 완성됐다. 롯폰기힐스의 연면적(75만9100㎡)을 앞선다.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에 연면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높이 330m 일본 최고층 빌딩 JP타워가 추가됐다.

이 공간에 21만4500㎡의 오피스, 2만3000㎡의 쇼핑몰, 에르메스·까르띠에·불가리 등 명품 업체 10곳과 150개의 점포가 들어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웬만한 아파트 단지만 한 1400가구 주택과 122실 규모의 최고급 호텔, 도쿄 도심 최대 국제학교, 종합병원이 이 작은 도시 안에 자리 잡았다.

도심 기능을 꽉꽉 채웠다고 해서 콘크리트로 둘러친 빌딩을 떠올려서는 곤란하다. 6000㎡의 중앙광장을 포함해 전체 부지 면적의 37%인 2만4000㎡가 녹지다. 부지면적이 더 큰 롯폰기힐스 녹지(1만9000㎡)보다 더 넓다. 이곳에 심어진 나무의 종류만 320가지다.

아자부다이힐스는 낮에는 2만 명이 근무하고, 밤에도 3500명이 거주하는 명실상부한 도시다. 서울광장 6개분의 땅과 여의도 파크원타워(연면적 62만7411㎡)보다 37% 넓은 연면적에 동대문역 부근 신당10구역만 한 아파트 단지를 품고, 청담동(2023년 12월 기준 2만4629명) 규모의 주민이 거주한다. 도쿄 안의 ‘미래 도쿄’를 짓는 데 6400억 엔(약 5조8400억원)이 들었다.

아자부다이힐스는 모리빌딩이 세웠다. 모리빌딩은 롯폰기힐스, 도라노몬힐스 등 도쿄의 도심 스카이라인을 바꿔놓은 명소를 잇달아 탄생시킨 부동산 개발회사다. 2003년 콤팩트시티의 효시로 개발한 롯폰기힐스는 오늘날 3000만~4000만 명이 찾는 도쿄의 문화 명소로 탈바꿈했다. 2023년 최종 완공된 도라노몬힐스는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로 자리매김했다.

롯폰기힐스와 도라노몬힐스 사이에 위치한 아자부다이힐스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도시’를 기치로 내걸었다. 모리빌딩은 연간 3000만 명이 아자부다이힐스를 찾을 것으로 기대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