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경1000조 엔의 금융자산 보유한 일본 가계, 그 중 절반 이상이 현찰과 예금
일본 관광객이 물었다 ①일본 관광객을 당혹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겐킨노미(現金のみ, 현금만 가능)’ 혹은 ‘NO 크레딧 카드’ 사인이다. 소규모 식당이나 잡화점은 물론이고 대도시를 벗어날 경우 료칸(일본의 전통 숙박소), 심지어 열차 티켓 구매도 현찰로만 가능한 경우가 많아 낭패를 보게 된다.
21세기에 가당치도 않다 싶겠지만 현지 일본인들에 대한 측은지심과 인내심을 발휘할 적기라 생각하면 맘 편하다. 그것은 30년 장기 침체가 빚어낸 풍경이자 개인 경제 주체들이 내건 생존의 팻말들이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주식시장, 투자비율은 고작 18%
2024년 1월 9일 일본 닛케이 지수는 33,763을 찍었다. 1990년 버블경제가 만든 정점 38,921(1990년 1월 4일)에는 미달하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회복하는 데 3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수가 1990년 이래 최대 호조를 보이자 주식시장 유입 투자자도 증가 추세다.
현재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보유한 일본의 개인 주주는 약 6000만 명, 전체 인구의 46%에 달한다. 14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28%에 불과한 우리나라에 비하면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하지만 투자자 수가 많다고 해서 주식시장에 돈이 많이 몰려 있는 것이 아니다. 투자금액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행(BOJ)에 따르면 일본인 금융자산 중 직접 주식투자 비율은 17%가량으로 한국의 20%는 물론이고 유럽의 28%와 미국의 33%에 비해 현저히 낮다. 작년 한 해 한국의 투자자들은 부러운 눈으로 일본 시장을 바라봤지만 정작 필자 주변의 일본 지인들은 의외로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소액 투자금만 예치되어 있으니 수익 규모 자체가 환상적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일본인들은 어떤 금융자산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할까? 어이없게도 현금보유가 압도적인 ‘투자처’다. 아래 <표1>에서 드러나듯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 비해 일본인의 현금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미국과 유럽 지역의 경우 총 금융자산 중 현금 비중은 각각 13%와 31%인 반면 일본은 무려 54%에 달한다. 반면 주식 같은 고위험 자산에 대한 투자에는 매우 소극적임을 알 수 있다. 지난 30년간 일본 사회에서 현금은 피난처이자 투자처였으며 장기침체에 빠진 일본 가계의 수호신 역할을 해왔다. 현재 가계가 보유 중인 현찰만 따져도 독일과 인도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은행에 예치한 돈까지 포함하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사우디 아람코 모두를 인수할 수 있다. 일본의 지존은 천황이 아니라 현금 아닐까?
현금 집착의 합리적 근거들
일본에서 현금이 숭상되는 실질적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보아 경제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경제적 요인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현금 보유보다 더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투자가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발생한 버블 붕괴와 그 후 수십 년간 지속된 낮은 인플레이션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일본의 초기 ‘잃어버린 10년’(1991~2001년) 동안 연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평균 0.8%에 불과했다. 그 후 ‘다시 잃어버린 20년’(2001~2021년)의 연간 인플레이션은 평균 0.1% 미만을 기록했다.
그중 10년 동안은 실질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물가, 서비스, 자산가치가 모두 하락한 것이다. 경기가 침체돼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국면의 최고 재테크는 현금 보유다. 같은 금액의 돈으로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것을 살 수 있으니까.
현금 대신 부동산은 어땠을까? 초저금리의 장기 모기지가 있다지만 지속 하락하는 주택가격 탓에 부동자산 획득은 무모한 카지노와 진배없다. 기존 주택과 모기지 보유자들도 자산 유동성과 안전성을 보완하기 위해 현금 비중 확대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은행예금보다 이른바 ‘장롱금고’를 선호한 이유는? 수신금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007~2010년 0.2% 미만, 2011~2016년 0.02% 미만, 2017년부터 0.001%로 추락한 예금 이자가 매력적일 리 없다. 송금이나 인출 시 적용되는 수수료를 감안하면 옷장 속 방치된 현금이 훨씬 더 스마트한 머니였을 것이다.
2016년 일본은행(BOJ)이 마이너스 금리를 선포하면서 현금의 은행 이탈이 가속화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정 세법이 금융자산에 대한 감시와 징수를 강화한 탓에 일반인들의 시중은행 기피현상이 더 심해졌다. 결국 은행 예탁금 상당 부분이 개인 금고 속으로 ‘홈커밍’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되는 것은 돈 그 자체였다. 귀하디 귀한 몸을 방구들이나 천장에 모셔둘 수는 없는 일. 이 무렵 2만~10만 엔짜리 가정용 금고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2016~2017년에만 매출이 각각 25%씩 급증했다 한다. 관광객들이 일본 길거리에서 은행을 쉽게 발견하기 힘든 이유도, 은행 대신 소규모 신용금고들만 눈에 잘 띄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버블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인들이 쌓아둔 부는 실로 어마무시하다. 일본 가계는 현재 총 2경1000조 엔의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절반 이상을 현금과 예금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OECD 국가 중 단연 1위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금 지상주의, 현금 왕국이라는 라벨도 전혀 손색이 없다. 돈맥경화의 주범, 현금 대방출 작전
여기서 흥미로운 지표 하나를 보자. 아래 <표2>는 일본인들의 금융자산 중 현금 비중이 버블경제 발생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높았음을 보여준다. 1979년 60%에 육박하던 현금비율은 1988년 대략 44%까지 떨어졌지만 2017년까지 40년간 큰 변동없이 50% 내외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 사회의 현금 숭배는 버블 발생이나 붕괴와 무관한,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형성된 일종의 사회적 관습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2차 대전 후 일본 정부는 재건 경제를 위해 가계 저축을 장려했고, 이를 높은 은행금리의 예금으로 흡수했다. 저축과 예금은 근로자들에게는 부의 축적을 안겨주었고 기업에는 원활한 자금 유통을 구현한 윈윈 방정식이었다.
그렇게 사회경제적 미덕으로 여겨지던 검소, 절약, 저축이 어느 순간 골칫거리로 둔갑했다. 역동적인 자금 순환과 공격적 투자가 중심인 금융자본주의하에서는 장롱 속 현찰과 은행에 묶인 예금이 ‘빌런’으로 지목될 수 있다. 또 주식이나 파생상품 투자 같은 핀테크를 도박으로 여기는 사회풍조 또한 ‘돈맥경화’ 유발 요인으로 꼽힌다.
일반 시민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업들도 일본 전체 GDP의 약 75%에 해당하는 400조 엔을 사내 유보금으로 쌓아두고 있다. 2012년 시작된 아베노믹스의 확장정책이 좌절된 것도 임금 상승과 자본 투자 대신 현금 축적에 급급한 기업들의 관행 때문이었다. 혁신을 위한 R&D가 단절된 것도, 내수소비가 실종된 것도 기업의 현금 과비축 습성과 밀접히 연동되어 있다.
‘억류’된 현금 구출을 고심하던 일본 정부가 최근 획기적 유인책을 꺼냈다. 개인저축계좌(NISA) 제도를 대폭 손질해 2024년 1월부터 주식투자에 대한 평생 면세 혜택을 전격 시행한 것이다. 연간 납입 한도 역시 120만 엔에서 360만 엔으로, 누적 한도를 600만 엔에서 1800만 엔으로 대폭 상향했다. 이로써 당국은 1980년대 버블 붕괴 이후 고착화된 주식 기피 현상을 상쇄하고 인질처럼 묶여 있는 초거대 현금의 석방을 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앞서 말했듯, 일본 가계는 전체 자산의 24%(직접 17%, 연금을 통한 7%)만을 주식으로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영국의 54%, 미국의 75%에 비해 절대적으로 낮은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 중 2%에 해당하는 218조 엔만 방출돼도 주식시장은 크게 도약할 것이라 말한다. 2023년 그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이 외국인 투자로 유입되면서 토픽스 지수가 25% 이상 상승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의 현금 대방출 작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축적과 보유의 절대 우상이었던 일본의 현금이 주식투자와 핀테크의 도약대로 용도변경될 수 있을까? 당혹스럽기만 한 ‘캐시 온리(現金のみ)’ 표지판은 이제 일본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인가? 일본 현금 대서사의 새로운 전개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