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깻잎 논쟁’에서 ‘부먹이냐 찍먹이냐’, ‘프라이냐 스크렘블이냐’까지. 근엄주의를 벗어난 미디어와 SNS에는 라이프스타일을 둘러싼 흥미롭고도 사소한 논쟁이 일상화되었다. 일본에서도 연예인들의 발언을 둘러싼 선택 논쟁이 온라인으로 번지곤 하는데 그중 하나가 지갑 논쟁이다.
뜬금없는 지갑 논쟁
넷플릭스의 ‘테라스 하우스’ 진행자 트린들 레이나는 2022년 ‘장지갑이냐, 반지갑이냐’ 논쟁에 불을 지폈다. 자신의 이상형은 반지갑을 소유한 남성이라고 밝히자 SNS에서는 어떤 지갑이 정돈에 용이한지, 지갑 유형과 성격이 정말 연관성을 가지는지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반지갑 사용자는 정리정돈에 능하고 안정적인 성품인 데다가 자산을 소중히 하는 남성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2017년 설문조사는 트린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연소득 1000만 엔 이상 전문직 131명 중 51.4%가 반지갑 소유자로, 34.4%에 그친 장지갑 사용자를 크게 앞섰다.
한편 회계사 출신 가메다 준이치로는 장지갑 ‘선교사’로 유명해졌다. 노숙자 신세에서 회계사로 일어선 그는 ‘부자들은 왜 장지갑을 쓸까’라는 저서를 통해 돈을 다루는 습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지갑이란 수입과 지출, 즉 부를 통제하는 관제실인 만큼 각별히 공을 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모바일 결제나 카드지갑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겐 이런 ‘레트로’ 논쟁이 낯설 수 있겠다. 하지만 일본은 각종 부조나 사의를 표할 때 헌 지폐가 금기시되며, 은행에서 새 지폐를 별도 주문하는 관행이 있는 사회다. 돈의 상태나 지갑의 형태를 재무 상황과 연결시킨 논쟁을 공허한 잡설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현금을 대하는 아날로그 경건성
돈을 소중히 다루는 습성이 거대한 부와 직결된다는 풍수적 믿음은 중국, 일본, 한국, 베트남 등 중화권의 보편적인 세계관이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금전 현물을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일본인들의 남다른 태도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우선 현금 거래의 에티켓부터 유별나다. 손에서 손으로 직접 전달하는 것이 금기시된 일본에서는 지인 간의 교환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봉투를 사용한다. 외국 관광객들은 각종 상거래에 쓰여지는 현금접시(캐시 트레이)도 신기하게 여긴다. 음식이나 차를 대접받는 정성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관행은 대략 10여 년 전 한국의 은행에도 유입됐다.

일본 가계 지출의 약 70%가 현금으로 이뤄지다 보니 가계부 작성은 당연지사다. 옛날 어머니들이 쓰던 아날로그 가계부 말이다. 모든 지출을 문자로 즉시 확인하고 카드 사용이 90%를 초과해 디지털 영수증에만 익숙한 한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향수를 자극하는 빈티지 느낌이랄까.

신권 지폐만이 아니라 작은 동전들에 대한 태도 역시 이채롭다. 편의점, 슈퍼, 전철역 할 것 없이 1엔부터 5, 10, 50, 100, 500엔까지 총 6개의 주화가 고르게 쓰여진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멸종위기’에 처한 동전지갑이 일본에서는 필수 지참물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휴대한다.

일상 속 깊이 파고든 진자(神社, 신사) 방문에도 동전이 긴요히 쓰인다. 기원과 함께 봉납할 때 5엔 동전을 가장 많이 쓰는데 ‘고엔’이란 발음이 상서로운 인연 또는 운을 뜻하는 고엔(御縁)과 똑같기 때문이다. 25엔은 이중의 운을 뜻하는 니주고엔(二重御縁)의 동음이의어로, 이 또한 애호된다.

동전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으며 고작 50원, 250원으로 어떤 큰 행운이 찾아올까 싶다. 하지만 1엔 단위까지 꼼꼼히 거래하는 일본 사회의 독특한 결을 한국 사회의 ‘통 큰’ 감수성으로 어찌 다 헤아리겠나. 감탄할 일도 아니지만 폄훼할 일도 아니다.
사진 1. 일본의 현금 접시 / 블룸버그
사진 1. 일본의 현금 접시 / 블룸버그
1엔, 띠끌로 만든 태산
아래 <사진2>처럼 일본 슈퍼나 소매점 어디를 가도 1엔 단위의 가격표가 눈에 띈다. 솔직히 눈에 거슬린다고나 할까. 도대체 어떤 산정 근거로 1엔 단위까지 올리고 내리는지 알 수 없으나 극한 정밀을 추구하는 일본 사회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풍경이다.

한편 카드나 모바일 결제에 익숙한 관광객들에게는 그리 반가운 장면이 아닐 수 있다. 손에 쥐어질 동전의 무게부터 덜컥 염려될 테니. 얼마 전 방문한 후배도 그랬다. “그냥 300엔 하면 어디 덧나나? 왜 굳이 298엔, 301엔이냐구!” 후배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는 듯했다.

이러니까 줄이 길지. 고작 요거 사려고 5분씩이나 기다리는 게 말이 되냐구!” 후배는 인내심을 잃어갔다. 매장을 빠져나오자 몇 엔 가지고 쪼잔하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또 그 불편을 묵묵히 감수하는 일본인들 모두 별종”이라고 칭얼댔다. 1엔, 과연 그것이 유발하는 불편과 시간 소모를 상쇄할 가치를 지닌 걸까? 나도 궁금했다.
사진2: 1엔 단위까지 활용하는 일본의 상품가격 / 소라뉴스24
사진2: 1엔 단위까지 활용하는 일본의 상품가격 / 소라뉴스24
1엔 알루미늄 동전의 무게는 정확히 1그램이다. 그래서 물 위에 뜬다. 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주화의 개당 생산단가는 무려 13엔이다. 알루미늄 가격이 많이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하나, 자기 ‘몸값’의 무려 13배를 요하는 주화 탓에 일본 조폐국은 막대한 손실을 겪고 있다.

조폐국에 따르면 시중 유통 1엔 동전은 1971년 기준 8900억 엔, 31년이 지난 2002년에는 4조1000억 엔으로 무려 4.5배나 증가했다. 최고치로부터 다소 줄었지만 2018년 6월 기준 3조7600억 엔이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즉 시중에 3조7600억 개의 1엔짜리 동전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뜻이다.

2021년 입헌민주당 리더 이즈미 겐타는 1엔과 5엔 동전의 폐기를 제안했다. 100엔 이상의 동전을 은행에 입금할 때 550엔의 수수료를 내야 하는 모순까지 지적했지만 당시 재무상 아소 다로는 소액거래가 아직 왕성하므로 폐지할 계획이 없다고 못 박았다.

시중 유통 1엔의 가치를 원가 13엔으로 환산하면 총 48조8800억 엔, 한화 약 440조원이다. 그야말로 띠끌이 모여 태산을 이룬 형세다. 현재 생산중단 상태에 있는 1엔이라는 태산, 디지털 결제의 거친 파고와 풍화를 늠름히 견뎌낼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500엔 쌍둥이 500원
1엔과 정반대로 500엔 동전은 일본의 고도성장과 선도성의 표상이었다. 1982년 첫 발행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유통 동전 중 최고가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다. 일본 아동들은 희망의 상징인 500엔 동전을 용돈으로 받아왔다. 후대에게 부를 물려주겠다는 선대의 의지 표현이었다.

저축과 돈관리에 엄격한 지도를 받은 일본 아동들은 지금까지도 500엔 저금통을 애용한다. 물론 40년 전 가치와 지금의 그것 사이의 간극은 크지만 말이다. 이렇게 일본의 자부심을 응축한 500엔 동전이지만 예기치 않은 도전과 수난도 겪어왔다. 대표적 사례가 위조 주화다.

흥미롭게도 한국의 500원짜리 주화 역시 1982년 같은 해 태어났다. 직경 26.5mm로 동일한 크기의 두 주화는 큐로니켈 합금으로 만들어진 ‘쌍둥이’였다. 교환가치 이외에 유일하게 벌어진 큰 차이는 ‘체중’이었다. 500원 주화가 7.7g으로 일본 500엔의 7.2g보다 약간 무거웠다.
사진3: 한국의 500원과 일본의 500엔 / 엑세스J
사진3: 한국의 500원과 일본의 500엔 / 엑세스J
0.5g의 무게 조절은 식은 죽 먹기였다. 부분적 마모나 절단 혹은 미세구멍으로 족했다. 이렇게 ‘체중감량’을 끝낸 500원 동전은 일본 쌍둥이 500엔 행세를 시작했다. 무게에 의존해 동전을 식별하는 일본 자판기가 집중공략 대상이었다. 1984년의 환율을 대략 1:10으로 잡으면 500엔의 가치는 한화 5000원, 원금 포함 10배 남는 ‘장사’였던 셈이다.

500원을 필두로 유사 크기의 외국 동전이 쇄도하자 일본 자판기 업계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결국 1992년 550만 대 자판기 중 70%가 500엔 동전 사용을 중단했다. 그 후로도 위조는 계속됐고 IMF 사태로 원화가치가 폭락하자 더 기승을 부렸다. 일본 경찰이 1999년 발견한 500원 동전만 해도 65만 개가 넘었다.

사실 일본 주화 위조는 그 전부터 있었다. 1977년 도입된 한국의 버스 토큰 역시 이렇게 오용된 바 있다. 풍산금속이 제작한 토큰은 1967년형 일본 50엔 주화를 벤치마킹했다. 직경 21mm, 홀 4mm, 무게 4g의 50엔 동전과 같은 외양은 물론 디자인 역시 절묘하게 닮았다. 일본 버스기사와 소매상들의 눈을 비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위변조의 역사를 로맨틱하게 덧칠하거나 정당화할 심산은 아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일종의 고백, 양국이 서로 모방하고 닮아가면서 발생하는 희비극들의 단면으로 여기면 좋겠다. 무엇보다 작은 동전도 존중받는 질서, 작은 것들이 고유의 역할을 지니며 결국 거대한 힘과 연결된다는 일본 동전들의 메시지만큼은 희석되지 않았으면 한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