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도 이런 이슈가 있다. 가계부채 위기다. ‘가계부채가 한국 경제의 뇌관이 될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려니 한다. 족히 20년간 미디어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정부와 시장도 “언젠가는 터지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닐 것”이라는 낙관론에 기대어 부채 문제 해결을 미뤄왔다.
하지만 점점 목에 차오르는 느낌이라고들 한다. 이런 사회의 타성에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이 뒤섞이며 가계부채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
심각성은 또 있다. 가계뿐 아니라 기업, 정부까지 한국 경제의 3대 주체 모두 부채 쓰나미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경고가 있어지고 있다.
위기감은 수치가 분기점을 넘어서며 확대되고 있다. 가계, 기업, 정부 부채를 합치면 6000조원, 여기에 한국에만 있는 전세금을 부채로 넣으면 7000조원에 이르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세계 1위, 기업부채 증가속도는 세계 2위이며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GDP 대비 총부채 비율이 높아진 나라가 됐다. 그럼에도 이런 위기감마저 일상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2002년 카드사태 이후 한국은 이렇다 할 큰 위기를 겪지 않았기에 위기론은 더 비현실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채는 칼과 같다. 잘 다루면 무기가 되지만 잘못 다루면 자신을 찌른다. 뇌관이 터지지 않더라도 부채는 악순환을 만든다.
빚 갚느라 소비는 위축되고, 자영업자는 도산하고,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소형 금융회사는 위기에 처한다. 빚의 그늘이다. 한국 사회는 빚의 그늘이 만들어낸 악순환의 고리에 진입하고 있다.
2024년 한국의 부채 위기는 몇 시를 가리키고 있을까.
가계부채 1위…부채비율 100% 한국이 유일 부채로 고통받는 사연은 유튜브와 온갖 미디어에 차고 넘친다. SNS에서 보는 먹고 쓰는 얘기에 익숙해져 현실감이 없다면 숫자를 보면 된다.
현재 국내에서 소득의 70% 이상을 빚 갚는 데 쓰고 있는 사람은 295만 명에 달한다. 전체 취업자 10명 가운데 1명꼴이다.
더 심각한 사람도 많다. 소득 전체를 빚 갚는 데 다 써도 모자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100%를 넘는 사람도 171만 명이다. 한 해 대기업이 고용하는 전체 인원과 비슷한 숫자다. 더 이상 빚을 낼 수 없는 다중채무자는 448만 명에나 이르렀다.
장기간 이어진 저금리에 익숙해져 부채를 늘려왔는데 느닷없이 금리가 상승한 영향이다. 가계의 원리금 상환 부담은 급증했다.
가계부채는 증가 규모와 속도 모두 임계치를 넘어섰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은 세계 주요 34개국 가운데 1위를 달렸다.
국제금융협회(IIF)가 최근 내놓은 가계부채 관련 보고서를 보면 작년 3분기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0.2%로 집계됐다.
직전 2분기(4∼6월·101.7%)보다 1.5%포인트 감소했지만 IIF의 조사 대상 34개국 중 GDP 규모보다 가계부채가 더 많은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2020년 이후 4년째 관련 통계에서 1위다. 전문가들이 경고하는 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의 ‘데드라인’은 80%다.
한은도 “가계신용비율이 80%를 넘으면 경기침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원리금 상환하느라 소비를 못 하는 사람이 늘면 경기가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한국을 제외하면 IIF 조사 대상 중 80%를 넘는 나라는 홍콩(95.2%), 태국(91.5%)밖에 없다. 이마저도 100%를 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기업마저 '부채위기' 대열 합류 가계만 문제라면 그래도 한국 경제 규모로 보면 버틸 만하다. 하지만 부채 증가 대열에 갑자기 조용하던 기업이 합류했다.
작년 3분기 기준 국내 상장사 가운데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은 회사는 40%가 넘어섰다. 1674개의 상장사 가운데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기업이 적자 낸 곳을 포함해 710개에 이르렀다.
전체의 42.4%. 이 수치는 위험 수준이다. 코로나19 사태 한가운데 있던 2020년 3분기에도 39.9%였기 때문이다.
기업부채도 글로벌 시장에서 정상을 향해 질주 중이다. 세계 34개국(유로 지역은 단일 통계)의 GDP 대비 기업부채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126.1%에 달했다.
홍콩(267.9%)과 중국(166.9%)을 빼면 1위다. 직전 분기보다 5.2%포인트 오르면서 싱가포르(125.0%)를 제치고 순위가 한 계단 높아졌다. 증가폭은 말레이시아(28.6%p) 다음으로 컸다.
이 지표가 불안한 이유는 또 있다. 한국과 순위를 다투는 국가들의 면면 때문이다. 홍콩은 중국이고,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하루아침에 문제를 해결하거나 숫자를 바꿀 능력이 있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이고, 말레이시아는 한국과 다른 부문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한국 기업들의 부채 증가는 이례적이다.
세계 주요국 기업들과 반대방향으로 내달린 결과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고, 세계 각국이 코로나19 때 푼 돈을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세계경제 주체들은 긴축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예외였다. 2022년 3분기(120.4%)와 비교해도 한국의 기업부채 비율은 5.7%포인트 더 높아졌다. 지난 1년간 기업부채 비율이 상승한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러시아, 중국 등 9개국에 불과했다.
상장사가 이 정도면 대열에서 탈락한 비상장사는 부지기수에 이를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이 수치도 글로벌 정상을 향해 가고 있다.
IIF는 한국을 포함해 주요 17개국의 기업 부도 증가율을 비교했는데, 2023년 10월까지 한국 기업의 부도 증가율은 전년 대비 약 40%로 네덜란드(약 60%)에 이어 2위였다. 가계, 기업이 흔들리면 정부가 받쳐줘야 한다. 다행히 한국 정부 사정은 좀 나은 편이다. 한국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48.9%였다. 주요국 가운데 22위로 비교적 안전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정부부채 증가 속도는 ‘마지막 보루’마저 흔들 수 있다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 1년 전인 지난해 3분기(44.2%)에 비해 4.7%포인트 높아졌다.
이는 홍콩, 아르헨티나, 중국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수준이었다. 안심하기엔 국가 규모나 경제 상황에서 한국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1997·2008년은 극복했는데…안전지대 무너졌다 현재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가계·기업·정부, 경제 주체 모두 부채 관련 경고들이 들어왔다는 데 있다.
과거 한국을 덮쳤던 위기와 다른 결정적 장면이다. 한국의 역사적 위기의 순간을 돌아보면 ‘안전지대’는 있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의 안전지대는 가계였다. 기업과 정부에 위기가 닥쳤어도 탄탄한 가계가 완충역할을 했다.
외환위기 당시 GDP 대비 기업대출 비율은 108.6%였지만 가계대출 비율은 40%대를 유지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에 빚을 갚고 다시 일어선 힘이었다.
가계가 위기를 겪은 것은 지난 2002년 카드사태였다. 소비를 늘려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부 정책에 맞춰 카드사는 길거리에서 신용이고 뭐고 보지도 않고 카드를 발급했다.
소득이 있건 없건 카드를 신나게 쓰고 카드사태를 맞았다. 이때는 살아난 기업들이 한국 경제를 떠받쳤다. 이후 이렇다 할 위기를 겪어보지 않은 한국의 가계는 서서히 빚을 늘려갔다.
그리고 2014년 정부가 “빚내서 집사라”고 권유하며 가계부채는 안전선인 80%를 벗어나며 현재의 위기상황에 처했다.
IMF의 토머스 헬블링 아태 부국장은 지난해 10월 “(한국의 가계부채가) 특정 기준이나 비율을 정해놓지 않았지만 OECD 상위 그룹 가운데서도 꽤 높은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가계부채 위기가 발생하면 1997년 IMF 외환위기의 몇십 배 위력일 것”이란 김대기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발언이 현실적인 이유다. 물론 현 정부에서도 가계부채가 급증했다.
중간에 다른 위기도 있었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때였다. 하지만 한국은 파고를 무난하게 넘겼다. ‘중국’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성장하면서 수출이 늘었다. 환율 급등은 대기업들에 기회를 줬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 대기업은 급성장하며 한국 경제를 떠받쳤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몰고온 부동산 문제에서 한국의 가계는 비켜나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정부는 10여 차례 부동산 대책을 내놓으면서 시장 규제를 강화했다. 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와 종합부동산세,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등을 도입했다.
이 제도의 옳고 그름을 떠나 과도한 자금의 부동산 시장 유입을 막는 결과로 이어졌다.
국내 가계부채 문제의 전문가로 알려진 서영수 SK증권 기획재무본부장은 저서 ‘2022 피할 수 없는 부채 위기’에서 “한국도 2008년까지 4년간 가계부채가 40%나 증가하는 등 부채 위험이 빠르게 증가했다”면서도 “하지만 한국만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주택담보대출의 LTV, DTI 도입과 함께 대출 만기를 장기화함으로써 실질적 위험을 성공적으로 줄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그때는 갭투자도 흔하지 않았고 전세자금 대출도 별로 없었다.
위기가 없었던 것이 독이 됐을까. 이후 전 세계는 앞으로 경험하지 못할 장기 저금리 체제에 들어갔다. 저금리라는 독에 빠져 너도나도 부채를 늘렸다.
이를 줄여야 할 때쯤 코로나19가 터졌다. 저금리 시대는 정점을 향해 달렸고, 자산 가격은 폭등했다. 화려한 쇼의 끝이었다. 미국이 금리인상에 나서자 빚의 역습이 시작됐다.
부채의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위험은 훨씬 커졌다. 가장 큰 문제는 부동산에서 시작됐고 붕괴가 온다면 부동산으로 인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PF, 아직 짓지 않은 부동산의 빚 2023년 12월 28일 시공 능력 평가 16위 대형 건설사인 태영건설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갚지 못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했다.
2013년 쌍용건설 이후 10년 만에 시공순위 30위권 이내 대형 건설사가 워크아웃에 돌입한 사건이다. 태영건설은 방송사 SBS를 소유한 태영그룹의 모태 기업이다.
태영건설을 무너뜨린 것은 ‘PF’였다. 태영건설의 PF 대출보증액은 약 3조2000억원에 달한다. 이날 태영건설은 만기가 돌아온 480억원의 서울 성수동 오피스 빌딩 PF 대출을 상환하지 못했다.
예견된 위기였다. 2022년부터 금융전문가들은 ‘부동산 PF’가 한국 금융위기의 ‘뇌관’이 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레고랜드’로 알려진 강원중도개발공사(GJC)의 채무 불이행 선언이 크고 작은 시작 중의 하나였다.
부동산 PF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부동산 시장은 가격 하락과 금리인상이 맞물린 동시에 물가 상승 영향으로 건설비까지 증가하는 중이다. 금융회사들은 코로나19 이후 부동산 활황에 올라타려고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금융권 부동산 PF 대출잔액은 2020년 말 92조5000억원에서 2023년 9월 말 134조3000억원으로 급증했다. 연체액도 계속 늘고 있다.
정부도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다. 지난해에는 전세대출을 늘리고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내놓는 등 부동산 부양에 나섰다. 이는 PF 대출 급증을 막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부가 부동산 부양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인을 준 셈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태도가 변하자 시장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시장에서는 태영 다음 넘어갈 기업의 명단까지 돌고 있다.
한·미 금리차 역대 최대, 채권 경색? 한국의 채권시장 상황도 PF 부실을 부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2023년 7월 27일 미국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더 올리면서 역대 최대폭이었던 한국과의 기준금리 격차가 더 커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2%포인트로 벌어진 역전 폭은 과거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수준이었다.
이미 1년 전 한국과 미국의 금리가 역전되면서 한국 채권에 투자할 매력도가 떨어진 상태였다. 2023년 1월엔 외국인의 채권자금 순유출이 52억9000만 달러(당시 한화 약 6조5168억원)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한국 채권 금리가 미국보다 낮아진 데다 원화 가치까지 올라가면서 외국인들이 한국 채권을 팔아치우기 바빴다는 뜻이다. 순유출 금액은 관련 통계가 집계된 2000년 이후 최대치였다.
한·미 금리차가 더 벌어진다는 건 한국 채권의 매력이 더 떨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채권시장의 유동성 경색이 본격화되는 길이었다.
이는 곧 PF 대출의 위기를 뜻했다. 금융사들이 PF 조달을 채권시장에서 주로 해 채권시장이 경색되면 PF의 유동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정부, 부채 다이어트 나서야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도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가계대출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금리를 올리면 한계 상황에 처한 가계와 기업, 특히 부동산 PF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국정감사 때 이창용 한은 총재는 곤혹스러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희(한은)가 금리를 더 올릴 경우 물론 가계대출을 잡을 수 있지만 이에 따른 금융시장 안정 문제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 결과가 지난 1월 11일 한은의 8연속 기준금리 동결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 총재는 올해에도 당분간 동결로 기조를 이어갈 것이란 입장을 시사했다. 시장 일각에서는 물가상승률 둔화와 국제유가 하락 등으로 기준금리 조기 인하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이 총재를 비롯한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은 올 상반기(1∼6월) 내에 금리인하는 어려울 것이란 의견이다.
전문가들은 조속히 가계부채 문제에 손을 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 가계부채를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은도 부채 축소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세계에서 나홀로 100%를 넘는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80% 수준까지 낮춰야 한다는 정책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경태 한은 부연구위원은 “DSR 예외 대상 축소, LTV 수준별 차등금리 적용, 일시상환 방식에 대한 가산금리 적용 등을 통해 대출 수요를 조절할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윤소희·임나영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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